[불교교리 공부하기]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 사성제

2021-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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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장에서 십이연기를 살펴봄으로써 노사라는 괴로움의 문제에 대한 원인을 고찰해 보았다. 십이연기의 교설은 이처럼 연기법을 기초로 하여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사성제의 가르침 또한 연기법의 이치에 기초하여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체계적으로 설하고 있는 교설로써, 사성제는 곧 십이연기의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재조직한 교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십이연기와 사성제는 따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가르침인 것이다.


먼저 사성제의 가르침이 불교의 교설에서 위치하는 중요성에 대해 살펴보자. [맛지마 니까야]에서는 사성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움직이는 모든 동물들의 발자국들이 모두 코끼리의 발자국에 포섭될 수 있고 코끼리의 발자국이야말로 가장 큰 크기인 것과 같이 어떤 가르침이든 그것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포섭된다. 무엇이 네 가지 인가? 그것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수행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이다.”


이처럼, 사성제의 교설은, 마치 코끼리의 발자국이 다른 모든 동물의 발자국을 포용하듯이, 불교의 다른 모든 가르침을 포괄하는 가르침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불교의 모든 교설은 이 사성제의 가르침에 포함되며, 이 가르침이야말로 부처님의 교설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 포괄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다섯 사람의 수행자에게 처음 가르침을 펴신 초전법륜(初傳法輪)에서 처음으로 설하신 진리도 바로 사성제와 팔정도의 교설이다. 이 가르침은, 진리를 설함에 있어, 매우 논리적이며, 실천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성제의 구체적 내용은,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이다. 그 내용은 경전에서와 같이 고성제는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집성제는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멸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도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수행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나타낸다.


이 사성제의 교설은 마치 의사가 병에 따라 약을 주듯이, 환자가 병을 치료하는 방법에 비유할 수 있다. 노병사라는 괴로움의 상태인 고성제는 환자가 병을 발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병을 발견했으므로 그 병의 원인을 알아야 하듯이 괴로움의 원인을 발견하는 작업이 바로 집성제이다. 병을 다 치료하여 건강한 상태는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괴로움의 소멸인 멸성제이다. 여기에서 환자는 병이 다 치유된 상태를 보게 되고, 치유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결론적으로 마지막에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방법에 대하여 구체적인 실천의 가르침을 베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도성제인 것이다.



(1) 고성제 –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불교는 지극히 현실적인 종교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총설이라고 할 수 있는 사성제(四聖諦)의 교설의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현실, 현상 세계에 대한 관찰과, 그 관찰을 토대로 한 현실의 판단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관찰해 보고는, ‘괴롭다’ 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현상의 세계를 ‘괴롭다’ 라고 하니, 혹자는, 불교는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고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실로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인 고성제(苦聖諦)는,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관찰해서 얻어낸 결론이다.


다른 것은 제치고라도, 죽음의 고통을 보자. 우리는 마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들 모두는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이 죽음의 문제는, 나의 주위에서 겪어 보지 않고서는, 절실히 느끼기가 힘들다. 내 부모님, 자식, 친구, 친지의 죽음을 직접 겪어 본 사람은, 죽음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죽음은 당연히 괴로움이라고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을 가정해보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 괴로워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음을 당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시한부 인생들이다. 이렇듯, 죽음이라는 한가지 절대불변의 현실만을 관찰하더라도, 우리의 현실은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죽음만을 놓고 보더라도, 우리의 인생은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괴로움은 죽음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대상을 마주하지 못하는 것,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야 하는 것, 구하고자 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 ‘나다’ 하는 상에서 오는 것, 즉, 오온이 치성한데서 오는 괴로움 등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괴로움을 사고팔고(四苦八苦)라고 한다. 이는 앞에서 자세히 언급하였으므로 이 장에서는 줄이도록 하겠다.


부처님께서는 이처럼 현실세계를 괴로움으로 규정하셨다. 앞에서 삼법인과 사법인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이기 때문에 중생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일체개고인 것이다. 물론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에게 이 세상은 열반적정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괴로움’이라는 현실관찰에 대해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현실이라는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삶은 괴로움의 바다 즉 고해(苦海)다. 괴로움이라는 바다를 건너가야만 저 피안에 이르는 것이다. 반야용선이라는 배를 타고 고해 바다를 건너며, 인로왕보살이 길을 인도해 줌으로써 저 피안으로 건너간다는 파라미타의 대승사상과 천도의식은 바로 이를 상징화하고 있다.


괴로움은 이처럼 성스러운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괴로움을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고해인 이유는 괴로움을 통해야만 저 진리의 피안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천상세계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너무 편리하고 편안하여 도를 성취하겠다거나, 깨달음을 얻겠다거나, 더 높은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등의 생각이 없다. 지옥세계는 너무 괴롭기 때문에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생각을 일으킬 수 없다. 다만 인간계에서만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통찰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괴로움을 딛고 일어날 수 있고,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마음을 낼 수 있으며, 거기에서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도, 도의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괴로움이야말로 우리를 깨닫게 하는 소중한 공부 재료가 되는 것이다. 실제 사람들은 평안하고 행복할 때는 절을 찾지도 않고, 수행이나 기도를 하지도 않다가, 무언가 괴로운 일이 생길 때, 혹은 역경에 처했을 때 저절로 기도, 수행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괴로움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괴로움이기만 한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중생들은 그 괴로움이라는 경계가 있었을 때 비로소 괴로움을 타파해 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일으키게 되고, 그럼으로써 괴로움 타파의 과정에서 삶을 깨닫고, 지혜를 증득하며,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중생들에게 괴로움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니다. 괴로움의 목적은 우리를 깨닫게 하고, 업장을 소멸시켜 주기 위한 자비로운 목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불교에서 사바세계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바세계는 인토, 혹은 감인토를 의미하는데, 참고 인내하는 세계라는 뜻이다. 이 세상은 탐진치 삼독의 번뇌를 겪으며, 사고팔고 및 오음성고라는 오온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참고 견뎌내며 살아야 하는 세상인 것이다. 괴로움을 받아들여 감내하고 참고 인내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괴로움이 우리에게 주려고 했던 보배의 지혜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은 우리를 괴롭히는 악마이거나 마장이 아니라, 사실은 괴로움이라는 방편을 쓰고 나타난 우리를 깨닫게 해 주는 고맙고도 자비로운 경계인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을 불교에서는 ‘성스러운 진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고성제라는,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의 장에서 우리는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가르침을 배우게 된다. 괴로움이 생겼을 때, 우리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괴로움을 거부하려고 든다.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는 이유도 모든 괴로움은 안 왔으면 좋겠고, 모든 즐거움만 다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아닌가. 그러나 참된 수행자라면, 이 세상이라는 사바예토가 본래 괴로움이라는 고해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지혜와 자비를 증득하는 인생수업의 세계임을 깨달아 모든 괴로움을 수용하고 받아들임으로 인해 깨달음으로 나아갈 것이다.


괴로움은 성스러운 진리이다. 괴로움이 올 때, 성스러운 진리가 오고 있음을 바로 알아 괴로움을 통째로 수용하고 받아들여 보라. 괴로움이 왔을 때 마음을 활짝 열어 받아들임으로써, 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충분히 올 만큼 와서,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가,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도록 허용해 주어 보라. 괴로움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더 깊이 괴로움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고, 그랬을 때 비로소 괴로움이 온 목적을 이해하게 된다. 괴로움을 거부하게 되면 오히려 그 괴로움은 더욱 지속될 수밖에 없다. 괴로움을 거부하는 마음으로 인해 괴로움이 가져다 주려고 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며, 그러면 우주법계는 더욱 더 지속적으로 남아 있으면서 더 큰 괴로움을 가져다 줌으로써 어떻게든 괴로움을 통해 깨닫도록 해 주려고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괴로움을 거부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더욱 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질 수밖에 없다. 괴로움의 목적은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받아들이고 수용해 그것이 주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면 괴로움도 빨리 사라지게 된다.



(2) 집성제 -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앞에서 집성제는,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가르침이라고 한 바 있다. 다시 말해, 현실에 대한 여실한 통찰을 통해, 현실을 괴롭다고 파악했으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해 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원인을 소멸시킴으로써 괴로움의 근본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다.


사고팔고라는 괴로움이 생겨난 원인은 무엇일까? 모든 괴로움을 대표하는 괴로움을 불교에서는 사고(四苦)라고 하며, 이는 생노병사이다. 이미 태어난 존재에게 있어 가장 큰 괴로움은 노병사인 것이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괴로움이다. 그렇다면 노병사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미 앞 장의 십이연기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렇다. 바로 십이연기의 유전문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 즉 집성제인 것이다.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이란 중생들의 생사윤회라는 유전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나타내 보여주는 가르침이다. 무명이 있어서 행이 있고, 행이 있어서 식이 있고, 결과적으로 생과 노사라는 모든 괴로운 삶이 생겨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유전문이다. 이러한 십이연기의 유전문은 곧 사성제의 집성제를 의미한다. 모든 괴로움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무명에서부터 노사까지 순서대로 사유하는 방법을 순관(順觀)이라고 하고, 노사에서 무명까지 거꾸로 사유하는 방법을 역관(逆觀)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노병사의 괴로움의 원인을 파악해 보고 그 원인이 생(生)에 있음을 아셨다. 태어났기에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생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니,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삼계의 생사 윤회하는 원동력이 되는 유(有)임을 아셨고, 그 원인은 다시 어떤 대상에 집착하는 취(取)에 있음을 아셨고, 또 그 원인은 애(愛), 그리고 그 원인은 수(受) ……. 이렇게 하나 하나 그 원인을 고찰해 올라가다 보니, 결국에는 무명(無明)이 생로병사의 근본 원인임을 여실히 아셨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이연기이며,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이라고 한다.


집(集)이라는 말은 ‘집기(集起)’ 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는 ‘모여서 일어난다’ 는 뜻으로,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즉, 집성제는 괴로움의 원인이 어느 특정한 한 가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적으로 여러 가지 원인들이 모여서 일어난 것임을 깨달으신 것이다. 그렇기에 십이연기의 모든 지분들이 모여서 결국 노병사라는 괴로움이 연기한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인생이 괴로움임을 여실히 보시고, 그 원인을 하나 하나 살펴보신 것이다. 그 결과 궁극의 괴로움의 원인은 무명(無明)임을 아셨다. 모든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바로 ‘어리석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태초에 근본무명으로 인해 한 생각 잘못 일으킨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근본을 끊으려면 지혜를 닦아야 한다. 그러나, 무명이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라고는 하지만, 나머지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모두가 생로병사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십이연기의 지분 중에서 괴로움의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요, 오직 바로 지금의 현실이기에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올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십이연기의 각 지분 중 생로병사를 초래한 세 가지 원인이 가장 현실적이고, 우리에게 직접적인 괴로움의 원인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애(愛), 취(取), 유(有)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괴로움, 고성제의 원인은 애욕과, 애욕으로 인해 그 대상에 집착하여 취하려는 취착심, 그리고 그러한 애욕, 취착으로 인한 잘못된 행위[有]가 바로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인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번뇌(煩惱)’라고 말한다. 이러한 번뇌의 종류는 108 가지나 된다고 하지만, 그 근본원인은 무명에 있는 것임을 올바로 일러주는 교설이 바로 ‘십이연기설’이다. 그런 연유로 사성제의 집성제를 무명과 갈애(애욕)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십이연기에서 가장 직접적 원인이 갈애이며, 근원적인 원인이 무명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수행자들이여,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는 바로 갈애이다.’라고 함으로써,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원인인 갈애를 집성제로 보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사성제의 집성제, 즉 괴로움의 원인은 십이연기의 유전문으로 십이연기의 모든 지분을 의미하며, 그것을 근본적으로 무명에서 시작되고,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갈애를 들 수 있기 때문에 무명과 갈애라고도 하며, 혹은 생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고 하여 집성제를 갈애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3) 멸성제 -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멸이란, ‘니르바나’의 음역으로,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하며, 흔히 ‘열반’이라 표현한다. 다시 말해, 괴로움의 원인인 온갖 번뇌의 불길이 모두 꺼진 상태, 즉, 고가 소멸된 상태이다. 현대적으로 표현한다면, ‘최고의 행복’, ‘절대적 행복’ 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집성제는,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을 고찰해 십이지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 근본원인이 무명(無明)이라고 관찰한 것이다. 그렇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멸성제]는 어떻게 하면 될까? 불교는 현상계가 ‘괴롭다’ 라고 하여, 그 원인을 밝히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는 않는다. 즉, 괴로움의 원인을 밝힌 것은, 그 원인을 제거하여 괴로움이 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작업일 뿐이다. 집성제인 괴로움의 원인을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통해 살펴보았다면, 멸성제에서는 그 십이연기의 지분을 소멸시켜 나가는 환멸문을 통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노병사의 괴로움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생(生)을 멸해야 하고, 생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유(有)를 멸해야 하고, 유를 멸하기 위해 취(取)를 멸해야 하고, 이렇게 해서, 결국에는 무명(無明)을 멸하면 괴로움의 모든 고리가 풀려서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의 상태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십이연기의 환멸문(還滅門)’이라 하며, 이렇게 관찰하여 열반의 상태로 다다르는 관법이 바로 역관(逆觀)이다. 이러한 십이연기의 환멸문이 바로 멸성제인 것이다. 그렇기에 멸성제는 다른 말로,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지분이 모두 소멸된 경지이기 때문에 열반이라고도 표현되는 것이다.


멸성제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될 수 있음을 설하고 있으며,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되면 열반에 이를 수 있음을 설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인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은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소멸함으로 인해 멸해 없앨 수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의 모든 고는 소멸될 수 있다. 고를 없앤 완전한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 멸성제는 우리에게 깨달음의 가능성과 고를 소멸할 수 있는 가능성에 눈뜨게 한다. 누구나 고를 소멸하고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열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살아있는 동안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 즉, 육신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 하여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하고,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 한다. 후자는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므로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苦)가 모두 소멸된 열반의 경지이다.



(4) 도성제 - 괴로움 소멸의 수행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이상에서와 같이 괴로움의 원인을 탐구하였고, 원인을 소멸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면,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그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수행방법을 설하고 있는 도성제다. 도성제는 말 그대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성스러운 길로서,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보통 도성제는 ‘중도(中道)’ 혹은 팔정도로 알려져 있다. 양 극단을 떠난 조화로운 실천 수행법인 중도는 구체적으로 팔정도로 구현된다. 또한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의 실천이기도 하다. 또한 팔정도 말고도 부처님 입멸시에는 삼십칠조도품을 도성제라고 하고 있기도 하다.


도성제, 즉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기 위한 수행에 대해서는 장을 달리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붓다수업> 중에서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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