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기독교 전문 서적을 몇 권 구입하려고 가까이 있는 기독서점엘 들른 적이 있다. 한참을 책을 보면서 빠져 있다가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하려고 책 두어 권을 내미는데, 서점 주인이 ‘어떻게 하다가 젊으신 분이 출가까지 하셨어요?’ ‘하느님을 진작 만났으면 좋았을텐데’ 하시며 안쓰럽게 바라보시더니 기독 서적 두 권을 꼭 읽어보고 구원 받으라며 공짜로 주신 적이 있다.
정말 하느님 가르침을 너무나도 진지하게 믿으시며 그로 인해 깊이 행복해하시는 느낌이 내 안에 전해져 왔다. 그러면서도 한 편에서는 ‘어느 한 종교가 그렇듯 온전하고 아름답다면 다른 종교 또한 그럴 수도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작은 미소로 꼭 읽어보겠다고 말씀드리고는 그냥 나왔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친 것이 굳어지면 그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탓이기도 했고, 그 분의 순수한 신앙이 한 편으로는 아름답게 다가오기도 했고 물론 나 또한 그런 때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처음 출가했을 때나 불교를 처음 공부할 때는 이 공부의 즐거움과 행복감에 너무 깊이 빠져 그것 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수행이 어쩌고, 불교가 어쩌고 하면서 남들이 보면 불교에 미쳤다고 할 만큼 맹목적으로 입만 열면 불교 얘기에 여념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공부 해 본 바로는, 이렇게 말하긴 좀 뭣해도, 그 때의 내 신앙의 수준이 걸음마 때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이제 와서 느끼는 점은 꼭 ‘불교’여야만 한다거나, ‘불경’ 안에만 진리가 있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비불교적이고 진리를 벗어난 생각이었나 하는 점이 분명해진다. 불교는 불교 자체에도 머물러 집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진리의 성품이 어떤 틀에 고정되거나, 어떤 방법으로 한정되거나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설사 그것이 불교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부처를 ‘마른 똥 막대기’라고도 하고, ‘부처를 말하면 사흘 동안 입을 씻으라’고도 했으며, 또 한 선사는 춥다고 목불을 뗄감으로 쓰기도 했다. 그만큼 진리라는 것은 파격 그 자체다. 그러나 그 파격은 어떤 한 가지를 목숨을 내놓고 전적으로 믿는 그런 절대적 믿음의 신앙으로써의 파격이 아닌 어디에도 갇히지 않은 대자유의 걸림 없는 공성空性을 그 배경으로 하는 파격이다. 그러니 어찌 불교 그 자체에 집착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신앙하면서도 그 신앙에 갇히지 않으며, 그것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 어떤 소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그것이 참된 진리의 속성이 아닐까. 그랬을 때 비로소 그 어떤 종교에도 갇히지 않을 수 있고, 그 어떤 사상, 사람, 견해, 주의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주변에서 목사님이나 신부님, 수녀님 혹은 그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분들 가운데에서도 참된 신앙인으로써 걸림 없는 자유로운 길을 걷는 분들을 보아왔다. 그 타종교 성직자분들 중에는 불교 경전을 매우 열심히 공부하는 분도 계셨고, 절수행이나 명상을 꾸준히 실천하는 분들도 뵈었다. 중요한 점은 그렇게 어딘가에 갇혀 있지 않고 활짝 열린 사람은 꾸준히 변화 발전하고, 정신적으로도 날마다 성장, 성숙한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이것만이 전부’라는 독선과 독단이 없고, 마음이 활짝 열려 있으니, 그 열린 마음으로 진리가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타종교 뿐 아니라, 불교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불자들 중에도 특정한 한 가지 수행법만이 우수하다거나, 특정한 스님만이 훌륭하다거나, 특정 사상, 특정 경전에만 갇혀 있는 사람은 그것 너머의 무한의 지혜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결국, 활짝 열려 있는 정신 속에 진리는 깃드는 것이다.
글쓴이:법상
한번은 기독교 전문 서적을 몇 권 구입하려고 가까이 있는 기독서점엘 들른 적이 있다. 한참을 책을 보면서 빠져 있다가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하려고 책 두어 권을 내미는데, 서점 주인이 ‘어떻게 하다가 젊으신 분이 출가까지 하셨어요?’ ‘하느님을 진작 만났으면 좋았을텐데’ 하시며 안쓰럽게 바라보시더니 기독 서적 두 권을 꼭 읽어보고 구원 받으라며 공짜로 주신 적이 있다.
정말 하느님 가르침을 너무나도 진지하게 믿으시며 그로 인해 깊이 행복해하시는 느낌이 내 안에 전해져 왔다. 그러면서도 한 편에서는 ‘어느 한 종교가 그렇듯 온전하고 아름답다면 다른 종교 또한 그럴 수도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작은 미소로 꼭 읽어보겠다고 말씀드리고는 그냥 나왔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친 것이 굳어지면 그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탓이기도 했고, 그 분의 순수한 신앙이 한 편으로는 아름답게 다가오기도 했고 물론 나 또한 그런 때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처음 출가했을 때나 불교를 처음 공부할 때는 이 공부의 즐거움과 행복감에 너무 깊이 빠져 그것 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수행이 어쩌고, 불교가 어쩌고 하면서 남들이 보면 불교에 미쳤다고 할 만큼 맹목적으로 입만 열면 불교 얘기에 여념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공부 해 본 바로는, 이렇게 말하긴 좀 뭣해도, 그 때의 내 신앙의 수준이 걸음마 때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이제 와서 느끼는 점은 꼭 ‘불교’여야만 한다거나, ‘불경’ 안에만 진리가 있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비불교적이고 진리를 벗어난 생각이었나 하는 점이 분명해진다. 불교는 불교 자체에도 머물러 집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진리의 성품이 어떤 틀에 고정되거나, 어떤 방법으로 한정되거나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설사 그것이 불교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부처를 ‘마른 똥 막대기’라고도 하고, ‘부처를 말하면 사흘 동안 입을 씻으라’고도 했으며, 또 한 선사는 춥다고 목불을 뗄감으로 쓰기도 했다. 그만큼 진리라는 것은 파격 그 자체다. 그러나 그 파격은 어떤 한 가지를 목숨을 내놓고 전적으로 믿는 그런 절대적 믿음의 신앙으로써의 파격이 아닌 어디에도 갇히지 않은 대자유의 걸림 없는 공성空性을 그 배경으로 하는 파격이다. 그러니 어찌 불교 그 자체에 집착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신앙하면서도 그 신앙에 갇히지 않으며, 그것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 어떤 소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그것이 참된 진리의 속성이 아닐까. 그랬을 때 비로소 그 어떤 종교에도 갇히지 않을 수 있고, 그 어떤 사상, 사람, 견해, 주의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주변에서 목사님이나 신부님, 수녀님 혹은 그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분들 가운데에서도 참된 신앙인으로써 걸림 없는 자유로운 길을 걷는 분들을 보아왔다. 그 타종교 성직자분들 중에는 불교 경전을 매우 열심히 공부하는 분도 계셨고, 절수행이나 명상을 꾸준히 실천하는 분들도 뵈었다. 중요한 점은 그렇게 어딘가에 갇혀 있지 않고 활짝 열린 사람은 꾸준히 변화 발전하고, 정신적으로도 날마다 성장, 성숙한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이것만이 전부’라는 독선과 독단이 없고, 마음이 활짝 열려 있으니, 그 열린 마음으로 진리가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타종교 뿐 아니라, 불교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불자들 중에도 특정한 한 가지 수행법만이 우수하다거나, 특정한 스님만이 훌륭하다거나, 특정 사상, 특정 경전에만 갇혀 있는 사람은 그것 너머의 무한의 지혜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결국, 활짝 열려 있는 정신 속에 진리는 깃드는 것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