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하루 일과를 보면, 오전에 탁발에서 돌아온 뒤 대중 스님들에게 법문을 설하십니다. 그리고 삼매에 들어 스님들이나 신도님들, 뭇삶들의 괴로움이 있는지를 살피고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일반 재가신도님들의 방문을 받고 신도님들께 법문을 설해주십니다. 저녁 때에는 스님들의 방문을 받고 그들의 공부를 점검해 줍니다. 그리고 한밤중에는 천신들이나 악마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위한 법문을 설하신다고 합니다.
중국 초기 선불교의 스승들의 일과를 보더라도, 한 절의 스승이 되는 스님은 몇 백 명 정도의 수좌스님들을 제접하면서 매일 제자들을 입실지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조는 입실 제자만 139명에 이를 정도였다거나, 또 어떤 스님은 매일 하루에 100여 명의 스님들을 입실케하여 지도했다고도 합니다. 또한 조참, 마참, 소참법회라고 하여 매일 같이 수시로 크고 작은 다양한 법회가 있어서 제자들은 스님께 매일 법문을 듣고 공부를 이어가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이처럼 부처님 당시와 선불교의 황금기라고 불리우는 선종 초기의 시대, 즉 육조혜능으로부터 마조도일, 백장, 황벽, 임제, 조주 등의 시대를 보면, 언제나 법회가 매일 매일 활발하게 열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법이 가장 활활발발하게 살아났던 때가 바로 이 두 시대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법회에 참석하고 법문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알게 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초기 불교 경전을 살펴보면 신기하게도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행을 시키고 그러는 내용 보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법을 설해주는 법회의 내용이 주로 등장을 합니다.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법문도 있고, 특정한 제자를 대상으로 하는 법회도 있고, 공양 이후에 행하는 법회도 있지요. 마찬가지로 초기 선불교 시대에도 끊임없이 스승과 제자는 1:1로 입실지도하여 만나거나, 일상 생활 중에 툭툭 건네는 법거량으로 이끌거나, 소참법회 등으로 법을 설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법에서 가장 중요한 수행은, 이처럼 법문이고, 설법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에도 자등명 법등명 하라고 하신 것을 보더라도, 자기 자신을 법의 등불로 삼고, 부처님 법, 법문을 법의 등불로 삼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법문을 듣는 것이야말로 불법을 공부하는 수행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수행입니다. 사실은 수행법을 익히고, 수행법을 갈고 닦는 것이 수행이 아니라, 법을 가까이 하고, 법문을 듣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가장 중요한 공부 방법입니다. 선사 어록을 한번 살펴보세요. 좌선하다가 깨달았다거나, 수행 중에 견성했다는 내용을 거의 찾아보기 힘듧니다. 주로 법문을 듣다가 깨닫거나, 일상사에서 깨닫습니다.
우리는 ‘수행을 해야 깨닫는다’라는 것을 기정 사실인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법문을 듣고 깨닫는다’는 것은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현실이지요. 그러나 말씀드린 것처럼 부처님 당시와 육조 혜능 스님 당시를 보세요. 법문이야말로 가장 일상적인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법이었습니다.
불자 여러분, 매일 매일 법문을 듣는 것을 수행으로 삼으십시오. 요즘은 불교방송, 인터넷, 유튜브 등을 보면 얼마나 많은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까? 옛날처럼 경전 말씀 하나 구하려고 삼장법사가 고난의 행군을 감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법을 들을 수 있습니다. 법문을 듣고 깨닫는 것이 바로 불법 공부의 핵심입니다. 법문, 법회야말로 불교 공부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법문 듣는 것은 수행이 아니라고 오해하지 마시고, 법문 듣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전통적인 바른 길임을 깨달아 법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글쓴이:법상
부처님의 하루 일과를 보면, 오전에 탁발에서 돌아온 뒤 대중 스님들에게 법문을 설하십니다. 그리고 삼매에 들어 스님들이나 신도님들, 뭇삶들의 괴로움이 있는지를 살피고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일반 재가신도님들의 방문을 받고 신도님들께 법문을 설해주십니다. 저녁 때에는 스님들의 방문을 받고 그들의 공부를 점검해 줍니다. 그리고 한밤중에는 천신들이나 악마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위한 법문을 설하신다고 합니다.
중국 초기 선불교의 스승들의 일과를 보더라도, 한 절의 스승이 되는 스님은 몇 백 명 정도의 수좌스님들을 제접하면서 매일 제자들을 입실지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조는 입실 제자만 139명에 이를 정도였다거나, 또 어떤 스님은 매일 하루에 100여 명의 스님들을 입실케하여 지도했다고도 합니다. 또한 조참, 마참, 소참법회라고 하여 매일 같이 수시로 크고 작은 다양한 법회가 있어서 제자들은 스님께 매일 법문을 듣고 공부를 이어가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이처럼 부처님 당시와 선불교의 황금기라고 불리우는 선종 초기의 시대, 즉 육조혜능으로부터 마조도일, 백장, 황벽, 임제, 조주 등의 시대를 보면, 언제나 법회가 매일 매일 활발하게 열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법이 가장 활활발발하게 살아났던 때가 바로 이 두 시대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법회에 참석하고 법문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알게 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초기 불교 경전을 살펴보면 신기하게도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행을 시키고 그러는 내용 보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법을 설해주는 법회의 내용이 주로 등장을 합니다.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법문도 있고, 특정한 제자를 대상으로 하는 법회도 있고, 공양 이후에 행하는 법회도 있지요. 마찬가지로 초기 선불교 시대에도 끊임없이 스승과 제자는 1:1로 입실지도하여 만나거나, 일상 생활 중에 툭툭 건네는 법거량으로 이끌거나, 소참법회 등으로 법을 설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법에서 가장 중요한 수행은, 이처럼 법문이고, 설법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에도 자등명 법등명 하라고 하신 것을 보더라도, 자기 자신을 법의 등불로 삼고, 부처님 법, 법문을 법의 등불로 삼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법문을 듣는 것이야말로 불법을 공부하는 수행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수행입니다. 사실은 수행법을 익히고, 수행법을 갈고 닦는 것이 수행이 아니라, 법을 가까이 하고, 법문을 듣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가장 중요한 공부 방법입니다. 선사 어록을 한번 살펴보세요. 좌선하다가 깨달았다거나, 수행 중에 견성했다는 내용을 거의 찾아보기 힘듧니다. 주로 법문을 듣다가 깨닫거나, 일상사에서 깨닫습니다.
우리는 ‘수행을 해야 깨닫는다’라는 것을 기정 사실인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법문을 듣고 깨닫는다’는 것은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현실이지요. 그러나 말씀드린 것처럼 부처님 당시와 육조 혜능 스님 당시를 보세요. 법문이야말로 가장 일상적인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법이었습니다.
불자 여러분, 매일 매일 법문을 듣는 것을 수행으로 삼으십시오. 요즘은 불교방송, 인터넷, 유튜브 등을 보면 얼마나 많은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까? 옛날처럼 경전 말씀 하나 구하려고 삼장법사가 고난의 행군을 감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법을 들을 수 있습니다. 법문을 듣고 깨닫는 것이 바로 불법 공부의 핵심입니다. 법문, 법회야말로 불교 공부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법문 듣는 것은 수행이 아니라고 오해하지 마시고, 법문 듣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전통적인 바른 길임을 깨달아 법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