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시자는 일반적으로 아난존자라고 알고 있다.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열반하기 전 25년 간의 기간 동안 시자의 소임을 다했다. 그러나 아난존자가 본격적으로 시자의 소임을 행하기 전에는 많은 스님들이 돌아가면서 그 때 그 때 형편에 따라 부처님 곁에서 시봉을 했다.
메기야 스님이 어느날 부처님의 시자가 되어 부처님을 모시고 탁발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메기야 시자 비구는 탁발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름다운 망고동산을 보고는 그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이 곳에서 좌선 수행을 하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내고는 부처님께 말씀드린다.
부처님께서는 ‘너를 대신할 시자 비구가 올 때까지는 기다리는 것이 어떠냐?’라고 청하셨지만 메기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두 번 거절했지만 메기야의 뜻이 완강함을 보고는 세 번째 그 청을 들어 주신다.
부처님 일대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번 거절했지만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았을 경우에는 이와 같이 그 청을 들어주시는 일들을 목격하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깨달아 진리를 분명히 알고 보시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생각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옳다고 집착해 타인의 생각을 억누르고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는다. 이처럼 두 번 거절하지만 계속해서 청을 할 경우에는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제자의 뜻에 따라 준 것이다.
예를 들어 석가족을 침략하기 위해 유리왕이 군대를 끌고 카필라성을 향해 전진할 때에도 부처님께서는 세 번을 말리며 직접 나가 군대를 회군시키셨지만 네 번째 또 다시 유리왕이 진격을 할 때는 더 이상 말려서 될 문제가 아님을 보시고 다시 나가지 않으셨다. 신통제일의 목건련이 부처님께 저 군대를 신통으로 타방세계로 던지겠다고 했을 때 부처님은 ‘너는 저 석가족의 전생 인연도 타방세계로 다 던져버릴 수 있느냐’고 하심으로써 인과응보의 법칙은 어쩔 수 없음을 설하셨다.
그 어떤 전적으로 옳은 견해일지라도 그 견해에 집착하면 그것은 옳지 않다. 본래 절대적으로 옳은 견해가 어디 있는가. 옳고 그른 것 자체가 공할진데, 내 생각이 전적으로 옳다는 생각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내 생각이 옳은가 그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생각에 집착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있다. 옳은 생각을 일으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생각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에 있다.
이 부처님의 방식을 눈여겨 보라. 우리의 하루하루 삶을 보면, 내 말을 안 듣는다고 화를 내면서 두 번, 세 번이 아니라 내 뜻이 어떻게든 관철될 때까지 고집스레 밀고나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서 그것을 뚝심이라거나, 추진력이라고 하면서 미화하기도 하고, 사람은 어느 정도 고집은 있어야 한다며 위안을 삼곤 한다.
물론 머물러 집착하는 바가 없다면 때때로 밀어붙이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집착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거나, 내 고집을 자존심 때문에 꺾지 못하거나, 내 생각이 옳다라는 지독한 아만심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이제부터는 부처님의 이 방식을 써 보면 어떨까? 두세 번까지는 밀어 붙여 보는 것이다. 물론 두세 번이라는 것도 정해진 어떤 것이 아니니, 사안에 따라서는 두세번, 서너번 정도 밀어 붙여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너댓번, 그 이상을 했는데도 안 된다면 그건 인연이 아니구나 하고 빨리 마음을 접고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법상
부처님의 시자는 일반적으로 아난존자라고 알고 있다.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열반하기 전 25년 간의 기간 동안 시자의 소임을 다했다. 그러나 아난존자가 본격적으로 시자의 소임을 행하기 전에는 많은 스님들이 돌아가면서 그 때 그 때 형편에 따라 부처님 곁에서 시봉을 했다.
메기야 스님이 어느날 부처님의 시자가 되어 부처님을 모시고 탁발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메기야 시자 비구는 탁발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름다운 망고동산을 보고는 그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이 곳에서 좌선 수행을 하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내고는 부처님께 말씀드린다.
부처님께서는 ‘너를 대신할 시자 비구가 올 때까지는 기다리는 것이 어떠냐?’라고 청하셨지만 메기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두 번 거절했지만 메기야의 뜻이 완강함을 보고는 세 번째 그 청을 들어 주신다.
부처님 일대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번 거절했지만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았을 경우에는 이와 같이 그 청을 들어주시는 일들을 목격하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깨달아 진리를 분명히 알고 보시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생각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옳다고 집착해 타인의 생각을 억누르고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는다. 이처럼 두 번 거절하지만 계속해서 청을 할 경우에는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제자의 뜻에 따라 준 것이다.
예를 들어 석가족을 침략하기 위해 유리왕이 군대를 끌고 카필라성을 향해 전진할 때에도 부처님께서는 세 번을 말리며 직접 나가 군대를 회군시키셨지만 네 번째 또 다시 유리왕이 진격을 할 때는 더 이상 말려서 될 문제가 아님을 보시고 다시 나가지 않으셨다. 신통제일의 목건련이 부처님께 저 군대를 신통으로 타방세계로 던지겠다고 했을 때 부처님은 ‘너는 저 석가족의 전생 인연도 타방세계로 다 던져버릴 수 있느냐’고 하심으로써 인과응보의 법칙은 어쩔 수 없음을 설하셨다.
그 어떤 전적으로 옳은 견해일지라도 그 견해에 집착하면 그것은 옳지 않다. 본래 절대적으로 옳은 견해가 어디 있는가. 옳고 그른 것 자체가 공할진데, 내 생각이 전적으로 옳다는 생각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내 생각이 옳은가 그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생각에 집착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있다. 옳은 생각을 일으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생각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에 있다.
이 부처님의 방식을 눈여겨 보라. 우리의 하루하루 삶을 보면, 내 말을 안 듣는다고 화를 내면서 두 번, 세 번이 아니라 내 뜻이 어떻게든 관철될 때까지 고집스레 밀고나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서 그것을 뚝심이라거나, 추진력이라고 하면서 미화하기도 하고, 사람은 어느 정도 고집은 있어야 한다며 위안을 삼곤 한다.
물론 머물러 집착하는 바가 없다면 때때로 밀어붙이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집착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거나, 내 고집을 자존심 때문에 꺾지 못하거나, 내 생각이 옳다라는 지독한 아만심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이제부터는 부처님의 이 방식을 써 보면 어떨까? 두세 번까지는 밀어 붙여 보는 것이다. 물론 두세 번이라는 것도 정해진 어떤 것이 아니니, 사안에 따라서는 두세번, 서너번 정도 밀어 붙여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너댓번, 그 이상을 했는데도 안 된다면 그건 인연이 아니구나 하고 빨리 마음을 접고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