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2) - 미시세계의 무상
202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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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럭키2024-11-27 20:37
미립자의 상호작용이 있기 전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편만 해 있습니다.
상호작용이 있기 전에는 미립자가 어느 위치에서 어느 속도에서 언제 사라지고 생겨날지 전혀 모릅니다.
이를테면 무한한 가능성의 장으로(파동으로) 편만 해 있다가 촉하는(상호작용) 순간 대상으로(입자로) 확인되는 것입니다.
불교적 표현으로 보면 여래장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에서 경계가 접촉되는 순간 인연 따라 다양한 모습이 나투는 것입니다.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업을 짓느냐에 따라 무한한 가능성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투어 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능성의 측면에서 보면 신구의 삼업을 자연스레 지혜와 자비로써 행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반대 측면에서는 신구의 삼업을 아상에 기반하여 탐진치를 행하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할지도 모릅니다.
현대 과학에서는 여러 실험을 통해 미시세계와 거시세계 간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서 불교 아닌 불교가 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그러나 불교는 불교가 아니라 그 이름이 불교입니다.
번뇌즉보리 입니다.
바른 가르침 수희찬탄 합니다.
상호작용이 있기 전에는 미립자가 어느 위치에서 어느 속도에서 언제 사라지고 생겨날지 전혀 모릅니다.
이를테면 무한한 가능성의 장으로(파동으로) 편만 해 있다가 촉하는(상호작용) 순간 대상으로(입자로) 확인되는 것입니다.
불교적 표현으로 보면 여래장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에서 경계가 접촉되는 순간 인연 따라 다양한 모습이 나투는 것입니다.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업을 짓느냐에 따라 무한한 가능성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투어 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능성의 측면에서 보면 신구의 삼업을 자연스레 지혜와 자비로써 행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반대 측면에서는 신구의 삼업을 아상에 기반하여 탐진치를 행하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할지도 모릅니다.
현대 과학에서는 여러 실험을 통해 미시세계와 거시세계 간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서 불교 아닌 불교가 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그러나 불교는 불교가 아니라 그 이름이 불교입니다.
번뇌즉보리 입니다.
바른 가르침 수희찬탄 합니다.
현대 과학에서는 무상(無常)을 어떻게 볼까? 미시와 거시의 현대 물리학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불교의 제행무상의 이치를 고스란히 증명해 주고 있다.
이 세상이 무상하다는 이치를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세상을 쪼개고 쪼개서 가장 작게 쪼개어질 수 있는 물질의 최소 단위에 대해 무상을 입증해 보이는 것과 이 세상을 넓히고 넓혀서 가장 넓게 확장했을 때의 전 우주가 무상하다는 이치를 입증해 보이는 방법이 있다.
그러면 먼저 현대 물리학의 미시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불교의 극미(極微)라는 단어와 견줄 수 있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과학에서는 원자(原子)라고 한다. 그런데 후대에 오면서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 전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았고, 또한 이 양성자와 중성자도 궁극적인 물질이 아니라 다시 수없이 많은 미립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이 무수한 미립자들은 순간순간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것이 현대물리학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이 미립자들의 전형적인 생명은 10(-23승)초이다. 쉽게 말해 미립자의 생명과 1초와의 비는 1초와 약 300조년의 비와 같다고 한다. 300조 년은 지구 역사의 60만 배이며 우주 역사의 20만 배나 되는 긴 시간이다. 그야말로 찰나 동안 무수한 미립자들은 생성되고 소멸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아니 이 정도면 생성과 동시에 소멸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라는 존재와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구성하는 최소의 단위인 미립자는 매 순간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니 미립자 혹은 미진을 아무리 모아 놓는다고 할지라도 무상하게 변화하는 미립자의 모임인 물질과 우주 또한 똑같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