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탁드리오니 행자님, 저를 위해 법을 설하여 주십시오.”
제가 말했습니다.
“그대가 정말 법을 위해 왔다면, 이제 모든 인연을 다 쉬어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마십시오. 제가 그대를 위하여 설하겠습니다.”
잠시 침묵한 뒤에 혜명에게 말했습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 때 무엇이 혜명 상좌의 본래면목입니까?”
[육조단경]
혜능이 본성을 깨달았음을 아신 오조홍인(五祖弘忍) 대사께서는 ‘네가 바로 대장부(大丈夫)요, 천인사(天人師)요, 부처다’라고 하시며, 혜능에게 법과 의발(衣鉢)을 전해주시고 6조로 삼으셨다.
그런 뒤 오조께서는 육조라는 조사의 자리가 ‘남쪽에서 온 오랑캐’라고 불리고, 정식 스님도 아닌 ‘행자’에게 갔다는 사실을 알고 혜능을 해치거나, 의발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을 걱정해 직접 배를 물색하여 남쪽으로 피신시킨다.
한편 오조께서 매일 하던 상당법문을 하지 않으시자 대중이 여쭌다.
오조는 가사와 법이 혜능에게로 갔음을 알렸다.
대중은 수백 명이 혜능을 뒤쫓으며 가사와 발우를 빼앗고자 한다.
조사를 통해 법을 전하는 이 전통이 이토록 타락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사실 법은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전해주는 것도 아니다.
본래 누구에게나 구족되어 있으니, 그저 확인하면 될 뿐, 빼앗을 것도 없고, 인가 받을 것도 없고, 그럴 만한 티끌만한 어떤 실체적인 무언가는 이 불법 안에는 없다.
그 가운데 장군 출신의 혜명스님이 가장 먼저 도착해 혜능을 찾았다.
다행히도 혜명상좌는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법을 듣기 위해 왔다.
혜능이 혜명에게 법을 설하는 내용에 주목해 보자.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그 때 어떤 것이 혜명 상좌의 본래면목인가?”
이 말 끝에 혜명은 언하대오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혜명은 이미 가슴 속에 자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발심이 익을 대로 익었고, 그 궁금증이 폭발 직전까지 와 있었을 것이다.
오조스님 문하에서 충분히 공부가 되어 있었지만 시절인연과 기연(機緣)을 아직 맺지 못했을 뿐.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 때 무엇이 혜명 상좌의 본래면목입니까?”
혜명은 이 한 마디에 몰록 깨달았다.
깨달음은 단순하다.
우리 중생들은 무엇이든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생각으로 헤아리며 분별한다.
좋거나 싫다고, 옳거나 그르다고, 선이나 악이라고, 크거나 작다고, 끊임없이 둘로 나누어 놓고, 좋은 것은 집착하고 싫은 것은 거부한다.
선은 붙잡고 악은 버린다.
좋은 것이 붙잡아지지 않을 때도 괴롭고, 싫은 것을 버리고 싶은데 버리지 못할 때도 괴롭다.
이처럼 둘로 나누어 놓고 그 중 어느 한 쪽을 취사선택하게 되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중생들의 습관적인 분별이다.
분별의 끝에는 언제나 괴로움이 있다.
혜능의 법은 단순하다.
바로 이 분별을 순간 딱 멈추게 한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그 어떤 분별도 남아 있지 않을 때, 그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을 때, 그 어떤 것도 버리거나 취하려 하지 않을 때, 바로 그 때도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분별이 일어나는 자리, 분별이 사라지는 자리, 분별 그 자체는 무엇에 의지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가?
그렇다면 분별이 사라지고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래면목이다.
글쓴이:법상
“부탁드리오니 행자님, 저를 위해 법을 설하여 주십시오.”
제가 말했습니다.
“그대가 정말 법을 위해 왔다면, 이제 모든 인연을 다 쉬어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마십시오. 제가 그대를 위하여 설하겠습니다.”
잠시 침묵한 뒤에 혜명에게 말했습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 때 무엇이 혜명 상좌의 본래면목입니까?”
[육조단경]
혜능이 본성을 깨달았음을 아신 오조홍인(五祖弘忍) 대사께서는 ‘네가 바로 대장부(大丈夫)요, 천인사(天人師)요, 부처다’라고 하시며, 혜능에게 법과 의발(衣鉢)을 전해주시고 6조로 삼으셨다.
그런 뒤 오조께서는 육조라는 조사의 자리가 ‘남쪽에서 온 오랑캐’라고 불리고, 정식 스님도 아닌 ‘행자’에게 갔다는 사실을 알고 혜능을 해치거나, 의발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을 걱정해 직접 배를 물색하여 남쪽으로 피신시킨다.
한편 오조께서 매일 하던 상당법문을 하지 않으시자 대중이 여쭌다.
오조는 가사와 법이 혜능에게로 갔음을 알렸다.
대중은 수백 명이 혜능을 뒤쫓으며 가사와 발우를 빼앗고자 한다.
조사를 통해 법을 전하는 이 전통이 이토록 타락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사실 법은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전해주는 것도 아니다.
본래 누구에게나 구족되어 있으니, 그저 확인하면 될 뿐, 빼앗을 것도 없고, 인가 받을 것도 없고, 그럴 만한 티끌만한 어떤 실체적인 무언가는 이 불법 안에는 없다.
그 가운데 장군 출신의 혜명스님이 가장 먼저 도착해 혜능을 찾았다.
다행히도 혜명상좌는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법을 듣기 위해 왔다.
혜능이 혜명에게 법을 설하는 내용에 주목해 보자.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그 때 어떤 것이 혜명 상좌의 본래면목인가?”
이 말 끝에 혜명은 언하대오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혜명은 이미 가슴 속에 자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발심이 익을 대로 익었고, 그 궁금증이 폭발 직전까지 와 있었을 것이다.
오조스님 문하에서 충분히 공부가 되어 있었지만 시절인연과 기연(機緣)을 아직 맺지 못했을 뿐.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 때 무엇이 혜명 상좌의 본래면목입니까?”
혜명은 이 한 마디에 몰록 깨달았다.
깨달음은 단순하다.
우리 중생들은 무엇이든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생각으로 헤아리며 분별한다.
좋거나 싫다고, 옳거나 그르다고, 선이나 악이라고, 크거나 작다고, 끊임없이 둘로 나누어 놓고, 좋은 것은 집착하고 싫은 것은 거부한다.
선은 붙잡고 악은 버린다.
좋은 것이 붙잡아지지 않을 때도 괴롭고, 싫은 것을 버리고 싶은데 버리지 못할 때도 괴롭다.
이처럼 둘로 나누어 놓고 그 중 어느 한 쪽을 취사선택하게 되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중생들의 습관적인 분별이다.
분별의 끝에는 언제나 괴로움이 있다.
혜능의 법은 단순하다.
바로 이 분별을 순간 딱 멈추게 한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그 어떤 분별도 남아 있지 않을 때, 그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을 때, 그 어떤 것도 버리거나 취하려 하지 않을 때, 바로 그 때도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분별이 일어나는 자리, 분별이 사라지는 자리, 분별 그 자체는 무엇에 의지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가?
그렇다면 분별이 사라지고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래면목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