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에서는 아나빠나사띠라고 하여,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호흡명상을 중요시합니다.
호흡명상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명상이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원칙은 ‘과도하게 애쓰지 않는 것’, 즉 유위(有爲)가 아닌 무위(無爲)라는 점입니다.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있을 때, 모든 것이 다 멈춘 가운데에도 여전히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들숨과 날숨입니다.
이 호흡명상은 억지로 호흡에 집중하라기 보다는, 사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냥 자연스럽게 있으라는 것인데, 그렇게 있다보면 자연스러운 호흡의 움직임이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내가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알아차려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억지스러운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알아차림입니다.
이 알아차림은 내가 수행해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본래부터 타고난 본성일 뿐입니다. 자신의 본래면목입니다.
사실 이것 하나만이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생각으로 분별하여 안 것이지만, 이 순수한 분별 이전의 알아차림은 전혀 머리로 해석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알아차려질 뿐이지요.
그러니 사실은 ‘호흡을 알아차린다’는 것도 말이고 분별일 뿐이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움직임(호흡)이 자각될 뿐입니다.
들숨과 날숨이라는 것도 우리가 붙인 이름일 뿐이지요.
이 또한 아상(我相)에 개입된 분별입니다.
이 몸이라는 ‘나’를 중심으로 분별하니까 내 안으로 들어오는 숨이 있고, 밖으로 나가는 숨이 있다고 분별한 것입니다.
‘들어오고 나간다’는 것, ‘들숨과 날숨’이라는 것도 분별이고 개념일 뿐이지요.
그런 분별도 빼면, 그저 어떤 움직임 -들숨과 날숨이라고 이름 붙인- 이 알아차려질 뿐입니다.
나머지는 다 분별일 뿐이지만, 이 본질적인 알아차림만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만이 진짜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 이것을 빼면 뭐가 남을 수 있겠어요?
이것이 전부 아닌가요?
호흡도 저절로 일어나고, 배도 저절로 고파오고, 저절로 잠에 들고 깨고, 저절로 키가 크고, 심지어 자동차에 앉으면 다른 생각이나 대화를 하는 가운데에도 저절로 손발은 완전자동으로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것이 이렇게 살아있고, 깨어있습니다.
귀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듣고,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봅니다.
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 자연스러운 알아차림, 이것이 존재의 본질입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의 내용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라고 이름 붙인 어떤 무형의 움직임이 스르륵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그 근원적인 분별 이전의 알아차림이 진짜입니다.
바로 이 모든 살아있음, 깨어있음, 알아차림 가운데 늘 하루 종일 떠나지 않으며, 가장 가까이에서, 늘 알아차려지는 것이 바로 호흡입니다.
그렇기에 이 호흡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명상을 불교에서는 늘 중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2분, 3분도 좋고, 5분이나 10분도 좋고, 좌선 자세를 취하고 앉아 30여 분을 해도 좋습니다.
너무 과도하게 억지로 오래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잠깐씩 자주 하는 것이 좋지만, 자연스럽게 몰입이 되어 저절로 명상시간이 길어진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저 그렇게 호흡과 함께, 지금 여기에서 가만히 그저 있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기경전인 대념처경과 입출식념경 등에 나오는 호흡 관찰 명상법이며, 사념처(四念處) 가운데 신념처(身念處) 수행 중의 하나로써, 부처님께서 보살 시절에 닦아 익힌 수행법일 뿐 아니라, 호흡관 삼매는 여래의 거처가 되고 행복의 거처가 된다고 쓰고 있습니다.
유위행(有爲行)으로 억지스럽게 수행하면 오히려 수행이 공부를 가로막지만, 방편인 줄 알고 집착 없이 수행하면, 그 수행은 나름의 방편의 효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글쓴이:법상
불교에서는 아나빠나사띠라고 하여,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호흡명상을 중요시합니다.
호흡명상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명상이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원칙은 ‘과도하게 애쓰지 않는 것’, 즉 유위(有爲)가 아닌 무위(無爲)라는 점입니다.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있을 때, 모든 것이 다 멈춘 가운데에도 여전히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들숨과 날숨입니다.
이 호흡명상은 억지로 호흡에 집중하라기 보다는, 사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냥 자연스럽게 있으라는 것인데, 그렇게 있다보면 자연스러운 호흡의 움직임이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내가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알아차려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억지스러운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알아차림입니다.
이 알아차림은 내가 수행해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본래부터 타고난 본성일 뿐입니다. 자신의 본래면목입니다.
사실 이것 하나만이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생각으로 분별하여 안 것이지만, 이 순수한 분별 이전의 알아차림은 전혀 머리로 해석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알아차려질 뿐이지요.
그러니 사실은 ‘호흡을 알아차린다’는 것도 말이고 분별일 뿐이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움직임(호흡)이 자각될 뿐입니다.
들숨과 날숨이라는 것도 우리가 붙인 이름일 뿐이지요.
이 또한 아상(我相)에 개입된 분별입니다.
이 몸이라는 ‘나’를 중심으로 분별하니까 내 안으로 들어오는 숨이 있고, 밖으로 나가는 숨이 있다고 분별한 것입니다.
‘들어오고 나간다’는 것, ‘들숨과 날숨’이라는 것도 분별이고 개념일 뿐이지요.
그런 분별도 빼면, 그저 어떤 움직임 -들숨과 날숨이라고 이름 붙인- 이 알아차려질 뿐입니다.
나머지는 다 분별일 뿐이지만, 이 본질적인 알아차림만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만이 진짜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 이것을 빼면 뭐가 남을 수 있겠어요?
이것이 전부 아닌가요?
호흡도 저절로 일어나고, 배도 저절로 고파오고, 저절로 잠에 들고 깨고, 저절로 키가 크고, 심지어 자동차에 앉으면 다른 생각이나 대화를 하는 가운데에도 저절로 손발은 완전자동으로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것이 이렇게 살아있고, 깨어있습니다.
귀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듣고,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봅니다.
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 자연스러운 알아차림, 이것이 존재의 본질입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의 내용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라고 이름 붙인 어떤 무형의 움직임이 스르륵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그 근원적인 분별 이전의 알아차림이 진짜입니다.
바로 이 모든 살아있음, 깨어있음, 알아차림 가운데 늘 하루 종일 떠나지 않으며, 가장 가까이에서, 늘 알아차려지는 것이 바로 호흡입니다.
그렇기에 이 호흡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명상을 불교에서는 늘 중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2분, 3분도 좋고, 5분이나 10분도 좋고, 좌선 자세를 취하고 앉아 30여 분을 해도 좋습니다.
너무 과도하게 억지로 오래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잠깐씩 자주 하는 것이 좋지만, 자연스럽게 몰입이 되어 저절로 명상시간이 길어진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저 그렇게 호흡과 함께, 지금 여기에서 가만히 그저 있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기경전인 대념처경과 입출식념경 등에 나오는 호흡 관찰 명상법이며, 사념처(四念處) 가운데 신념처(身念處) 수행 중의 하나로써, 부처님께서 보살 시절에 닦아 익힌 수행법일 뿐 아니라, 호흡관 삼매는 여래의 거처가 되고 행복의 거처가 된다고 쓰고 있습니다.
유위행(有爲行)으로 억지스럽게 수행하면 오히려 수행이 공부를 가로막지만, 방편인 줄 알고 집착 없이 수행하면, 그 수행은 나름의 방편의 효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