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성격이 더럽다’고 말했다고 할지라도, 사실 그 말은 나를 상처 줄 만한 실체적인 에너지를 지닌 말이 아니라, 그저 나에 대한 그 사람의 보는 관점을 서술한 말에 불과하다.
그 사람이 보는 관점에서, 그것도 아주 제한적인 관점에서, 나의 어떤 특정 행동을 보고 ‘성격이 더럽다’고 말 한 것일 뿐, 그것이 나의 ‘진짜’ 모습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내면에 부정적인 성향이 너무 강해서 모든 사람을 볼 때 부정적으로 보곤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성격 더럽다’고 한 그 말이 더 큰 문제인가? 아니면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괴로움에 빠져든 나에게 더 큰 일차적 잘못이 있는가? 그 말을 그저 가볍게 웃어 넘기고 말 것인지, 그 말에 빠져 큰 상실감을 두고 두고 가질 것인지는 언제나 나 자신이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그 말 한마디는 외부에서 오지만, 그것에 얼마나 큰 에너지를 부여할 것인지, 또 그 말에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지는 늘 나의 선택이다. 즉, 그 주도권은 언제나 외부 대상에 있지 않고, 늘 나 자신에게 있다.
연예인들이 악플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악플을 보고 자살하고 싶을 때가 있다고 한다. 한 연예인이 그 악플러를 잡고 보니 초등학생이고 심지어 자신의 펜이었으며,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악플을 달았다는 말을 듣고 맥이 풀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너무나도 큰 충격에 빠져 지냈었고, 심지어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힐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도 느꼈고, 나는 진짜 못난 사람이라는 자괴감에 빠져 지냈던 지난 날들이 모두 허망한 허상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결국 나 자신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나 또한 언젠가 종교계가 서로 싸우고 헐뜯을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로써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린 적이 있었다. 이 글이 포털싸이트의 메인에 오르면서 수십만 명이 클릭을 하고 반나절 만에 1,600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댓글 속에서 거의 종교 전쟁 수준의 싸움들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 1,600개의 댓글 중 첫 번째 댓글 하나만 기억을 하는데 딱 네 글자였다.
‘까.고.있.네’
외부의 사람들은 언제든 나를 욕하고, 험담하고, 악플을 달 수도 있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 아닌가. 나 혼자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며, 사람들은 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악플을 단 사람들은 아주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 것일 뿐인데, 받는 사람이 크게 괴로워한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닐까? 내가 과도하게 대응한다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일 뿐이다. 그 일을 실체화시키며, 힘을 부여해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바깥 대상인 경계는 언제나 가만히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바깥에서는 언제나 비도 오고 눈도 오고 좋은 날씨도 있다. 욕하는 사람도 있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다. 좋은 향기도 있고 나쁜 향기도 있으며, 좋은 감촉도 있고 나쁜 감촉도 있다. 그것이 세상이고 삶이다. 그것은 전혀 문제 상황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상황일 뿐이다.
그 자연스러운 상황에 ‘나’를 개입시켜 놓고, 나를 중심으로 적과 아군을 만들어 놓은 채, 온갖 해석, 판단, 분별을 가함으로써 괴로운 상황 혹은 즐거운 상황으로 꾸며내는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내 안에 중심이 서 있으면, 바깥 대상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글쓴이:법상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성격이 더럽다’고 말했다고 할지라도, 사실 그 말은 나를 상처 줄 만한 실체적인 에너지를 지닌 말이 아니라, 그저 나에 대한 그 사람의 보는 관점을 서술한 말에 불과하다.
그 사람이 보는 관점에서, 그것도 아주 제한적인 관점에서, 나의 어떤 특정 행동을 보고 ‘성격이 더럽다’고 말 한 것일 뿐, 그것이 나의 ‘진짜’ 모습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내면에 부정적인 성향이 너무 강해서 모든 사람을 볼 때 부정적으로 보곤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성격 더럽다’고 한 그 말이 더 큰 문제인가? 아니면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괴로움에 빠져든 나에게 더 큰 일차적 잘못이 있는가? 그 말을 그저 가볍게 웃어 넘기고 말 것인지, 그 말에 빠져 큰 상실감을 두고 두고 가질 것인지는 언제나 나 자신이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그 말 한마디는 외부에서 오지만, 그것에 얼마나 큰 에너지를 부여할 것인지, 또 그 말에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지는 늘 나의 선택이다. 즉, 그 주도권은 언제나 외부 대상에 있지 않고, 늘 나 자신에게 있다.
연예인들이 악플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악플을 보고 자살하고 싶을 때가 있다고 한다. 한 연예인이 그 악플러를 잡고 보니 초등학생이고 심지어 자신의 펜이었으며,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악플을 달았다는 말을 듣고 맥이 풀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너무나도 큰 충격에 빠져 지냈었고, 심지어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힐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도 느꼈고, 나는 진짜 못난 사람이라는 자괴감에 빠져 지냈던 지난 날들이 모두 허망한 허상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결국 나 자신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나 또한 언젠가 종교계가 서로 싸우고 헐뜯을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로써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린 적이 있었다. 이 글이 포털싸이트의 메인에 오르면서 수십만 명이 클릭을 하고 반나절 만에 1,600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댓글 속에서 거의 종교 전쟁 수준의 싸움들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 1,600개의 댓글 중 첫 번째 댓글 하나만 기억을 하는데 딱 네 글자였다.
‘까.고.있.네’
외부의 사람들은 언제든 나를 욕하고, 험담하고, 악플을 달 수도 있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 아닌가. 나 혼자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며, 사람들은 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악플을 단 사람들은 아주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 것일 뿐인데, 받는 사람이 크게 괴로워한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닐까? 내가 과도하게 대응한다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일 뿐이다. 그 일을 실체화시키며, 힘을 부여해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바깥 대상인 경계는 언제나 가만히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바깥에서는 언제나 비도 오고 눈도 오고 좋은 날씨도 있다. 욕하는 사람도 있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다. 좋은 향기도 있고 나쁜 향기도 있으며, 좋은 감촉도 있고 나쁜 감촉도 있다. 그것이 세상이고 삶이다. 그것은 전혀 문제 상황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상황일 뿐이다.
그 자연스러운 상황에 ‘나’를 개입시켜 놓고, 나를 중심으로 적과 아군을 만들어 놓은 채, 온갖 해석, 판단, 분별을 가함으로써 괴로운 상황 혹은 즐거운 상황으로 꾸며내는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내 안에 중심이 서 있으면, 바깥 대상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