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법문을 듣고 법안을 열어 불교에 입문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뒤에 꾸준히 수행이라는 범행을 닦아야 합니다
2024-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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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is2024-05-14 23:04
티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法眼]
티 없는 마리아, 순결한 예수님처럼
카톨릭에서도 '티 없는' 이라는 형용사를 많이 붙이는데요
모든 개념 모든 분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남을 다만 다른 각도로 조망했을 뿐
오직 '무심의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 감사합니다🧡
티 없는 마리아, 순결한 예수님처럼
카톨릭에서도 '티 없는' 이라는 형용사를 많이 붙이는데요
모든 개념 모든 분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남을 다만 다른 각도로 조망했을 뿐
오직 '무심의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 감사합니다🧡
초기불교의 [전법륜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꼰단냐 존자에게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건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티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法眼]이 생겼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구나. 참으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구나.”라고 하시며 안냐꼰단냐라고 부르게 됩니다.
연기법을 깨달은 것을 이처럼 '법안(法眼)이 생겼다'라고 묘사합니다.
또한 율장 [대품]에는
“오라. 비구여, 법은 잘 설해져 있으니, 바르게 괴로움을 모두 끝내기 위해 범행(梵行)을 닦으라.”고 설합니다.
꼰단냐가 법안(法眼)을 얻었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괴로움을 뿌리 뽑기 위해 범행을 닦으라는 것입니다.
선불교에서도 자신의 본래면목을 확인한 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하며, 견성이 공부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불교를 입문한 것과 같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보임이라는 공부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를 돈오점수라고도 하지요.
그렇다고 선에서 확인하는 성품, 자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연기법을 깨닫는 것이 곧 법안이듯,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멸하는 것일 뿐, 내세울 자성이 따로 없음을 자각하는 것이 곧 견성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선불교 어록에는 무심(無心)을 설합니다.
본심은 곧 무심이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 삼라만상 전부가 인연 따라 생멸할 뿐, 고정된 실체는 없기에, 무상, 고, 무아입니다.
이를 깨달으면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갈애가 없습니다.
다만 중생은 법안이 없었기에, 이 세상 모든 것이 실재한다고 여겼고, 그래서 집착하며 살았을 뿐이지요.
이제 연기법과 사성제를 통해,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괴로움을 소멸하게 되니, 더 이상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살아온 습관은 무시할 수 없어, 마치 자전거 브레이크를 잡았어도 한동안은 계속 달리듯, 여전히 중생들은 법안이 열리고도 생멸하는 허망한 것들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선불교도, 범행을 닦으라, 보임하라, 소를 키우라고 했던 것입니다.
초기불교와 대승, 선불교가 다르지 않습니다.
바른 법문을 듣고 법안을 열어 불교에 입문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뒤에 꾸준히 수행이라는 범행을 닦아야 합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