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처음 군에 들어와서 군승으로 막 시작할 때, 그 때 저와 함께 법당에서 일을 도와주던 군종병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전역 이후에 원하는 대기업에 취직하고자 열심히 공부하고 또 공부를 했습니다.
지방대생이라는 편견을 깨고 지방대를 나와도 대그룹에 취직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야 말겠노라고 했지요. 아마도 몇 년 동안 거의 100여 곳 이상 원서를 쓰고, 떨어지고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영어 실력을 더 키우려고 해외 연수도 다녀오고 그야말로 갖춰야 할 스팩을 만드느라 노력한 끝에 결국 10대 그룹 안에 드는 유망한 건설회사에 소위 SKY 대학 졸업자 혹은 석박사 이상 학력자들도 즐비한 틈 속에서도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에 입사하고 첫 번째 달 월급의 일부를 빳빳한 현금으로 뽑아서 봉투에 넣어가지고 저희 법당에 와서는 장병들 초코파이 값으로 써 달라고 찾아왔던 날을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렇게 행복해하던 친구였는데, 그렇게 꿈꿔왔던 대기업에서의 직장생활은 생각처럼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던가 봅니다. 물론 남들보다 먼저 대리로 진급도 하고, 인정도 받으며 열심히 생활했지만, 그럼에도 너무 힘들어 하더군요.
얘기를 들어보니, 거의 쉬는 날도 잘 없고, 야근도 밥 먹듯 자주 하고, 작업장도 자주 옮겨다니고, 그러다보니 주말부부로 밖에 살 수가 없고, 그야말로 끊임없이 일만 해야 한다고 하데요. 이렇게 힘들게 일, 일, 일에만 치여 사느니, 차라리 연봉을 적게 받더라도 중소기업에 취직하여 개인생활도 좀 가지고, 가족들과 주말에는 캠핑이나 여행도 좀 다니고, 절에도 다니면서 일과 휴식이 조화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무엇보다도 일이야 힘들어도 하면 되지만, ‘이렇게 사는게 과연 잘 사는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고민들이 계속된다고 합니다.
우리 삶을 가만 돌이켜 보세요. 우리는 너도나도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애쓰고, 많은 연봉을 받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려고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고 믿고 있고, 좋은 대학을 가려고 고교의 빛나는 학창시절을 공부와 시험에 대한 경쟁으로 다 허비해 버리곤 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명문고등학교, 과학고나 특목고를 가려고 중학생들도 공부에 혹사되고 있고, 그런 성적에 대한 강박증은 이미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 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서 결국 대기업이나 원하는 연봉을 어렵게 손에 넣었다고 할지라도 그로인해 인생까지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그만큼 연봉을 많이 받기 때문에 그만큼 더 일도 많이 시킬 것이고, 그만큼 대접을 받으려면 계속해서 일 속에 파묻히고, 끊임없이 평생동안 예민한 경쟁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이 친구처럼 ‘이게 아닌데’ 싶어 대기업을 그만두거나, 귀농을 하여 젊은 농부로 일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우리는 그동안 맹목적으로 성적이 좋아야 하고,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가야 한다고 여겨 왔지만, 왜 그 길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남들이 다 성적에 목을 메고 사니까 나도 그래야 한다고 여기며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욕 얻어먹지 않으려고 그저 앞만보고 달려온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해서 고액 연봉을 받거나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원하는 전문직을 얻었다 하더라도 뒤늦게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이 친구처럼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진정한 삶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천편일률적으로 성적, 학벌, 대기업, 연봉 이런 것들만 좇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우리가 맹목적으로 추구해왔던 외적인 조건들이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언젠가 읽었던 환경운동가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작은 우화가 생각납니다. 이 책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나선 한 애벌레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온 호랑 애벌레는 나뭇잎을 먹고 몸이 자꾸만 커집니다. 하는 일이라고는 먹는 일밖에 없었죠. 그런데 어느날 생각합니다. “그저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거야. 이런 삶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게 분명해”라고 말이지요. 호랑애벌레는 이상을 찾아 세상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러다가 애벌레 기둥을 만나죠.
많은 애벌레들이 꼭대기에 오르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을 봅니다.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고, 그 누구도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많은 애벌레들이 그 꼭대기에 오르려고 기를 쓰고, 경쟁하며, 서로 떠밀고 채이고 밟혀가면서도 끊임없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모두가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만 합니다. ‘밟고 올라가느냐 아니면 발 밑에 깔리느냐’ 하는 꼭대기를 향한 경쟁 속에 더 이상 친구는 없습니다.
이 애벌레의 우화가 꼭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같지 않습니까? 우리들도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고, 돈 벌고, 좋은 학벌, 좋은 대학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남들이 다 그 길을 향해 경쟁하며 달려가고 있으니까 나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맹목적으로 뒤따라 가는 것은 아닐까요?
호랑 애벌레도 결국 고생 끝에 꼭대기에 오릅니다. 그러나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죠. 호랑 애벌레도 이 친구처럼 다시 기둥을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그저 맹목적으로 남들을 따라 경쟁하며, 심지어 싸움도 불사해 가면서 높이 높이 오르려고만 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호랑 애벌레가 내려왔을 때 옛 연인이었던 노랑 애벌레는 아름다운 나비로 변해 있었습니다. 노랑 애벌레는 늙은 애벌레를 만나 나비가 되려면 ‘날기를 간절히 원해야 하고, 그것은 애벌레로 살아가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간절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서 결국 자신의 몸에서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고 나비가 되었습니다.
호랑애벌레는 꼭대기에 오르려면 남들과 경쟁하며 싸워 이겨 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날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방식대로 남들을 뒤따르며 맹목적으로 살던 삶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간절해야 하고, 그동안 달려왔던 어리석은 자신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새롭게 나비로 태어나 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도 호랑 애벌레처럼 앞만 보고 속도전을 방불케하는 경쟁에서 먼저 도착해 선점하려고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만약 그런 것 같다면, 호랑 애벌레처럼 잠시 멈춰 서 보세요. 멈춰 서서 지금 내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그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그것이 정말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인지 질문을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잠시 멈춰 서서 어두운 고치 속에 들어가 잠시 고통을 감내하고 수용하며 침묵하고 명상하는 시간이 정작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남들처럼 끊임없이 바깥의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가기 보다, 어쩌면 멈춰 서서 내면으로 들어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면 내면에서 그 해답이 드러나게 될지 모릅니다.
어쩌면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이유 없이, 지금 이 자리에 완전한 행복과 평화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몰록 깨달음을 통해 진정한 나를 찾고,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훨훨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글쓴이:법상
제가 처음 군에 들어와서 군승으로 막 시작할 때, 그 때 저와 함께 법당에서 일을 도와주던 군종병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전역 이후에 원하는 대기업에 취직하고자 열심히 공부하고 또 공부를 했습니다.
지방대생이라는 편견을 깨고 지방대를 나와도 대그룹에 취직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야 말겠노라고 했지요. 아마도 몇 년 동안 거의 100여 곳 이상 원서를 쓰고, 떨어지고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영어 실력을 더 키우려고 해외 연수도 다녀오고 그야말로 갖춰야 할 스팩을 만드느라 노력한 끝에 결국 10대 그룹 안에 드는 유망한 건설회사에 소위 SKY 대학 졸업자 혹은 석박사 이상 학력자들도 즐비한 틈 속에서도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에 입사하고 첫 번째 달 월급의 일부를 빳빳한 현금으로 뽑아서 봉투에 넣어가지고 저희 법당에 와서는 장병들 초코파이 값으로 써 달라고 찾아왔던 날을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렇게 행복해하던 친구였는데, 그렇게 꿈꿔왔던 대기업에서의 직장생활은 생각처럼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던가 봅니다. 물론 남들보다 먼저 대리로 진급도 하고, 인정도 받으며 열심히 생활했지만, 그럼에도 너무 힘들어 하더군요.
얘기를 들어보니, 거의 쉬는 날도 잘 없고, 야근도 밥 먹듯 자주 하고, 작업장도 자주 옮겨다니고, 그러다보니 주말부부로 밖에 살 수가 없고, 그야말로 끊임없이 일만 해야 한다고 하데요. 이렇게 힘들게 일, 일, 일에만 치여 사느니, 차라리 연봉을 적게 받더라도 중소기업에 취직하여 개인생활도 좀 가지고, 가족들과 주말에는 캠핑이나 여행도 좀 다니고, 절에도 다니면서 일과 휴식이 조화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무엇보다도 일이야 힘들어도 하면 되지만, ‘이렇게 사는게 과연 잘 사는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고민들이 계속된다고 합니다.
우리 삶을 가만 돌이켜 보세요. 우리는 너도나도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애쓰고, 많은 연봉을 받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려고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고 믿고 있고, 좋은 대학을 가려고 고교의 빛나는 학창시절을 공부와 시험에 대한 경쟁으로 다 허비해 버리곤 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명문고등학교, 과학고나 특목고를 가려고 중학생들도 공부에 혹사되고 있고, 그런 성적에 대한 강박증은 이미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 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서 결국 대기업이나 원하는 연봉을 어렵게 손에 넣었다고 할지라도 그로인해 인생까지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그만큼 연봉을 많이 받기 때문에 그만큼 더 일도 많이 시킬 것이고, 그만큼 대접을 받으려면 계속해서 일 속에 파묻히고, 끊임없이 평생동안 예민한 경쟁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이 친구처럼 ‘이게 아닌데’ 싶어 대기업을 그만두거나, 귀농을 하여 젊은 농부로 일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우리는 그동안 맹목적으로 성적이 좋아야 하고,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가야 한다고 여겨 왔지만, 왜 그 길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남들이 다 성적에 목을 메고 사니까 나도 그래야 한다고 여기며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욕 얻어먹지 않으려고 그저 앞만보고 달려온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해서 고액 연봉을 받거나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원하는 전문직을 얻었다 하더라도 뒤늦게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이 친구처럼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진정한 삶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천편일률적으로 성적, 학벌, 대기업, 연봉 이런 것들만 좇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우리가 맹목적으로 추구해왔던 외적인 조건들이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언젠가 읽었던 환경운동가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작은 우화가 생각납니다. 이 책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나선 한 애벌레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온 호랑 애벌레는 나뭇잎을 먹고 몸이 자꾸만 커집니다. 하는 일이라고는 먹는 일밖에 없었죠. 그런데 어느날 생각합니다. “그저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거야. 이런 삶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게 분명해”라고 말이지요. 호랑애벌레는 이상을 찾아 세상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러다가 애벌레 기둥을 만나죠.
많은 애벌레들이 꼭대기에 오르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을 봅니다.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고, 그 누구도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많은 애벌레들이 그 꼭대기에 오르려고 기를 쓰고, 경쟁하며, 서로 떠밀고 채이고 밟혀가면서도 끊임없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모두가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만 합니다. ‘밟고 올라가느냐 아니면 발 밑에 깔리느냐’ 하는 꼭대기를 향한 경쟁 속에 더 이상 친구는 없습니다.
이 애벌레의 우화가 꼭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같지 않습니까? 우리들도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고, 돈 벌고, 좋은 학벌, 좋은 대학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남들이 다 그 길을 향해 경쟁하며 달려가고 있으니까 나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맹목적으로 뒤따라 가는 것은 아닐까요?
호랑 애벌레도 결국 고생 끝에 꼭대기에 오릅니다. 그러나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죠. 호랑 애벌레도 이 친구처럼 다시 기둥을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그저 맹목적으로 남들을 따라 경쟁하며, 심지어 싸움도 불사해 가면서 높이 높이 오르려고만 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호랑 애벌레가 내려왔을 때 옛 연인이었던 노랑 애벌레는 아름다운 나비로 변해 있었습니다. 노랑 애벌레는 늙은 애벌레를 만나 나비가 되려면 ‘날기를 간절히 원해야 하고, 그것은 애벌레로 살아가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간절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서 결국 자신의 몸에서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고 나비가 되었습니다.
호랑애벌레는 꼭대기에 오르려면 남들과 경쟁하며 싸워 이겨 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날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방식대로 남들을 뒤따르며 맹목적으로 살던 삶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간절해야 하고, 그동안 달려왔던 어리석은 자신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새롭게 나비로 태어나 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도 호랑 애벌레처럼 앞만 보고 속도전을 방불케하는 경쟁에서 먼저 도착해 선점하려고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만약 그런 것 같다면, 호랑 애벌레처럼 잠시 멈춰 서 보세요. 멈춰 서서 지금 내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그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그것이 정말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인지 질문을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잠시 멈춰 서서 어두운 고치 속에 들어가 잠시 고통을 감내하고 수용하며 침묵하고 명상하는 시간이 정작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남들처럼 끊임없이 바깥의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가기 보다, 어쩌면 멈춰 서서 내면으로 들어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면 내면에서 그 해답이 드러나게 될지 모릅니다.
어쩌면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이유 없이, 지금 이 자리에 완전한 행복과 평화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몰록 깨달음을 통해 진정한 나를 찾고,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훨훨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