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 적에는 꾀나 종종 심심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특히나 겨울 방학 때면 어디 나가 놀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기가 너무나도 심심하고 무료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먹을 것이 풍족했던 때도 아니고, 지금처럼 인터넷 게임이나 재미있는 TV 프로가 다양하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 생고구마를 까먹으며 행복해했던 기억이 난다. 심심하던 때에 옆 집 친구가 놀러와 비료포대기를 한 장씩 들고는 뒷 산에 올라가 눈밭에서 눈썰매를 타거나, 눈싸움 하며 마을 어귀를 뛰어놀던 그 때가 때때로 그리워지곤 한다.
요즘 젊은 학생들이나 어린이들을 보면 심심할 일이 별로 없어 보인다. 공부에 너무 바빠서도 그렇고, 가야 할 학원도 많고, 무엇보다도 손 안에는 스마트폰이 초등학생 저학년부터 다 쥐어져 있는 듯 보인다. TV 프로는 또 얼마나 볼만한 것이 많은가.
물론 그것은 어른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 또한 요즘은 옛날처럼 심심하다거나 무료하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은 지가 꾀나 오래 된 듯 하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혹사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너무 쉬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지,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듯 싶다. 하다못해 쉴 때에도 무언가를 하면서 쉬어야 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쉬기만 한 때가 과연 있기는 할까? 옛날처럼 무료하고 심심할 기회가 있기는 한 것일까?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 그저 잠시 게을러질 수 있는 자유, 무료하고 심심해할 수 있는 그런 때는 정말 필요치 않은 것일까?
7년 전쯤 히말라야에서 1달 이상을 홀로 걷기만 한 적이 있었다. 저절로 묵언을 하면서, 고산 적응으로 많이 걷지도 못한 채, 그저 빈둥빈둥 놀며 걸으며 한 달 가량을 그저 시간을 죽이며 보내기만 했다. 되돌아보니, 그 때처럼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루에 서너 시간 걷는 것 외에는 할 일 없이 빈둥대던 때도 잘 없지 싶다. 그런데 바로 그 때의 기억,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언가에 쫒기지 않으며 그저 하루 하루를 살기만 했던 그 때가 아주 선명하게 종종 그리워지곤 한다.
그건 바로 할 일 없음이 주는 자유였다. 심심하고 무료하다는 것이 의외로 어릴 때처럼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껏 심심해주고, 마음껏 아무것도 안 하고, 마음껏 시간을 죽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새로운 기쁨의 순간이었다.
가끔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 보라.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해 줘 보라. 마음껏 심심해해 보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되지 않으며, 아무 것도 이루지 않고 있는 그 함이 없이 허비하는 시간, 바로 그런 시간의 텅 빔 속에 그저 존재할 때 사실 근원에서는 더욱 꽉 찬 충만이 피어오르는 것은 아닐까?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무언가가 되지 않더라도,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지금 이대로 모든 것은 완전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뤄야겠다거나, 해야겠다는 생각만 없으면, 우리는 그 무엇도 할 필요도 이룰 필요도 없다.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만 존재하게 될 때, 그것은 곧 지금 이대로의 완전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대로를 수용하며, 하나됨을 뜻한다. 바로 그 때, 내면에서 갈구, 되고자 함, 하고자 함이라는 모든 유위의 행이 멈추고, 무위의 공이 춤추게 된다. 근원의 힘이 비로소 깨어나게 될 것이다.
글쓴이:법상
아주 어릴 적에는 꾀나 종종 심심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특히나 겨울 방학 때면 어디 나가 놀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기가 너무나도 심심하고 무료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먹을 것이 풍족했던 때도 아니고, 지금처럼 인터넷 게임이나 재미있는 TV 프로가 다양하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 생고구마를 까먹으며 행복해했던 기억이 난다. 심심하던 때에 옆 집 친구가 놀러와 비료포대기를 한 장씩 들고는 뒷 산에 올라가 눈밭에서 눈썰매를 타거나, 눈싸움 하며 마을 어귀를 뛰어놀던 그 때가 때때로 그리워지곤 한다.
요즘 젊은 학생들이나 어린이들을 보면 심심할 일이 별로 없어 보인다. 공부에 너무 바빠서도 그렇고, 가야 할 학원도 많고, 무엇보다도 손 안에는 스마트폰이 초등학생 저학년부터 다 쥐어져 있는 듯 보인다. TV 프로는 또 얼마나 볼만한 것이 많은가.
물론 그것은 어른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 또한 요즘은 옛날처럼 심심하다거나 무료하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은 지가 꾀나 오래 된 듯 하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혹사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너무 쉬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지,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듯 싶다. 하다못해 쉴 때에도 무언가를 하면서 쉬어야 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쉬기만 한 때가 과연 있기는 할까? 옛날처럼 무료하고 심심할 기회가 있기는 한 것일까?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 그저 잠시 게을러질 수 있는 자유, 무료하고 심심해할 수 있는 그런 때는 정말 필요치 않은 것일까?
7년 전쯤 히말라야에서 1달 이상을 홀로 걷기만 한 적이 있었다. 저절로 묵언을 하면서, 고산 적응으로 많이 걷지도 못한 채, 그저 빈둥빈둥 놀며 걸으며 한 달 가량을 그저 시간을 죽이며 보내기만 했다. 되돌아보니, 그 때처럼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루에 서너 시간 걷는 것 외에는 할 일 없이 빈둥대던 때도 잘 없지 싶다. 그런데 바로 그 때의 기억,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언가에 쫒기지 않으며 그저 하루 하루를 살기만 했던 그 때가 아주 선명하게 종종 그리워지곤 한다.
그건 바로 할 일 없음이 주는 자유였다. 심심하고 무료하다는 것이 의외로 어릴 때처럼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껏 심심해주고, 마음껏 아무것도 안 하고, 마음껏 시간을 죽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새로운 기쁨의 순간이었다.
가끔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 보라.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해 줘 보라. 마음껏 심심해해 보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되지 않으며, 아무 것도 이루지 않고 있는 그 함이 없이 허비하는 시간, 바로 그런 시간의 텅 빔 속에 그저 존재할 때 사실 근원에서는 더욱 꽉 찬 충만이 피어오르는 것은 아닐까?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무언가가 되지 않더라도,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지금 이대로 모든 것은 완전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뤄야겠다거나, 해야겠다는 생각만 없으면, 우리는 그 무엇도 할 필요도 이룰 필요도 없다.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만 존재하게 될 때, 그것은 곧 지금 이대로의 완전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대로를 수용하며, 하나됨을 뜻한다. 바로 그 때, 내면에서 갈구, 되고자 함, 하고자 함이라는 모든 유위의 행이 멈추고, 무위의 공이 춤추게 된다. 근원의 힘이 비로소 깨어나게 될 것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