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문제는 ‘나는 부족하다’고 하는 결핍된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가난과 부자라는 단순한 이원론을 넘어, 능력의 있고 없음, 지혜의 있고 없음, 잘나고 못남, 중생과 부처 등의 수많은 이원론적인 차별심과도 맞닿아 있다.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은 곧 ‘나는 능력이 없다’, ‘나는 못났다’, ‘나는 실패자다’, ‘나는 어리석은 중생이다’라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
우리 모두는 완전성과 지혜, 무한한 자비와 사랑, 풍요로움과 그 모든 덕목을 완전하게 갖춘 존재라고 했다. 우리의 본질은 부처이지 중생이 아니다. 우리의 본질은 부족이 아니며 풍요이고, 증오가 아닌 사랑이며, 무명이 아닌 지혜이다. 완전성을 갖춘 본래불인 우리를 이렇게 어리석고 부족하고 못난 중생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 모든 것이 의식의 장난에 불과하다. 내 마음에서 모든 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는 거대한 환영에 빠져 있다. 중생이고 못났다는 환영이다. 물론 잘나고 풍요롭고 똑똑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 또한 내면을 가만히 살펴보면 누구보다 조금 더 잘나고 부자고 똑똑한 것일 뿐이지 근원에서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불완전성에 기초하고 있음이 금방 드러나게 된다. 바로 그 불완전성과 결핍성 그것이 우리의 현실을 불완전하게 또 부족하게 창조해 낸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풍족하게, 넉넉하게 살아왔는가? 삶이 마음먹은 것처럼 그렇게 넉넉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뭘까? 그건 내 마음이 넉넉하지 못한 거지, 물질이 넉넉하지 못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바로 그 순간에도 결핍감에 시달린다.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사업이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더 많이 돈이 부족하다. 회사도 더 키워야 하고, 돈도 더 벌어야 하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수 조원을 벌어들이는 회사일지라도 그 회사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장 많이 필요한 것은 언제나 돈이다. 왜 그럴까? 돈이 많으면 풍요를 느껴야 하는데 왜 돈이 무한히 많아진 순간에도 결핍을 느낄까? 그것은 마음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풍요와 부란 마음의 상태이지 물질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 네팔, 미얀마의 가난한 이들을 보고 와서 필자는 ‘우리나라 기초생활수급자들은 행복한 편에 속하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질적으로만 본다면, 아프리카에 사는 아이들에 비하면 엄청 행복한 것이다. 당장 밥 한 끼 못 먹어 오늘 하루 죽어나가는 8만 여 명의 아사자에 비한다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이 세상 모든 것은 에너지의 파장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물질이라는 것도 전부 하나의 파장이고 파동이다. 생각도 파장이고 파동이다. 모든 딱딱한 물질들도 사실 깊이 바라보면 파장이라는 에너지에 불과하다.
생각이라는 하나의 파동이 물질을 만들어낸다. 지금까지 스스로 끊임없이 살아오면서 ‘나는 가난하다, 풍요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니까, 바로 그 생각 에너지가 물질세계를 궁핍하게 창조해 온 것이다.
그래서 사실 생각해 보면 제일 쉬운 것이 부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풍요롭다’는 생각으로 바꿀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도저히 생각을 바꿀 수 없다. 왜? 두렵기 때문이다. ‘내가 이것을 베풀면 나중에 가난해 질 텐데? 내 돈이 줄어들 텐데’ 우리는 언제나 미래가 두렵고 노후가 막막한 것이다.
글쓴이:법상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문제는 ‘나는 부족하다’고 하는 결핍된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가난과 부자라는 단순한 이원론을 넘어, 능력의 있고 없음, 지혜의 있고 없음, 잘나고 못남, 중생과 부처 등의 수많은 이원론적인 차별심과도 맞닿아 있다.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은 곧 ‘나는 능력이 없다’, ‘나는 못났다’, ‘나는 실패자다’, ‘나는 어리석은 중생이다’라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
우리 모두는 완전성과 지혜, 무한한 자비와 사랑, 풍요로움과 그 모든 덕목을 완전하게 갖춘 존재라고 했다. 우리의 본질은 부처이지 중생이 아니다. 우리의 본질은 부족이 아니며 풍요이고, 증오가 아닌 사랑이며, 무명이 아닌 지혜이다. 완전성을 갖춘 본래불인 우리를 이렇게 어리석고 부족하고 못난 중생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 모든 것이 의식의 장난에 불과하다. 내 마음에서 모든 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는 거대한 환영에 빠져 있다. 중생이고 못났다는 환영이다. 물론 잘나고 풍요롭고 똑똑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 또한 내면을 가만히 살펴보면 누구보다 조금 더 잘나고 부자고 똑똑한 것일 뿐이지 근원에서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불완전성에 기초하고 있음이 금방 드러나게 된다. 바로 그 불완전성과 결핍성 그것이 우리의 현실을 불완전하게 또 부족하게 창조해 낸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풍족하게, 넉넉하게 살아왔는가? 삶이 마음먹은 것처럼 그렇게 넉넉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뭘까? 그건 내 마음이 넉넉하지 못한 거지, 물질이 넉넉하지 못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바로 그 순간에도 결핍감에 시달린다.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사업이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더 많이 돈이 부족하다. 회사도 더 키워야 하고, 돈도 더 벌어야 하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수 조원을 벌어들이는 회사일지라도 그 회사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장 많이 필요한 것은 언제나 돈이다. 왜 그럴까? 돈이 많으면 풍요를 느껴야 하는데 왜 돈이 무한히 많아진 순간에도 결핍을 느낄까? 그것은 마음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풍요와 부란 마음의 상태이지 물질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 네팔, 미얀마의 가난한 이들을 보고 와서 필자는 ‘우리나라 기초생활수급자들은 행복한 편에 속하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질적으로만 본다면, 아프리카에 사는 아이들에 비하면 엄청 행복한 것이다. 당장 밥 한 끼 못 먹어 오늘 하루 죽어나가는 8만 여 명의 아사자에 비한다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이 세상 모든 것은 에너지의 파장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물질이라는 것도 전부 하나의 파장이고 파동이다. 생각도 파장이고 파동이다. 모든 딱딱한 물질들도 사실 깊이 바라보면 파장이라는 에너지에 불과하다.
생각이라는 하나의 파동이 물질을 만들어낸다. 지금까지 스스로 끊임없이 살아오면서 ‘나는 가난하다, 풍요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니까, 바로 그 생각 에너지가 물질세계를 궁핍하게 창조해 온 것이다.
그래서 사실 생각해 보면 제일 쉬운 것이 부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풍요롭다’는 생각으로 바꿀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도저히 생각을 바꿀 수 없다. 왜? 두렵기 때문이다. ‘내가 이것을 베풀면 나중에 가난해 질 텐데? 내 돈이 줄어들 텐데’ 우리는 언제나 미래가 두렵고 노후가 막막한 것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