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성제 - 괴로움의 소멸
2024-09-13
조회수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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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2024-09-17 07:00
[멸성제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자신에게 바로 멸성제의 삶으로 곧장 뛰어들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문득 전환의 순간.]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이... 공부라고 여기며..
오늘도 삶으로 정진여^^ 감사합니다~^^♡
[문득 전환의 순간.]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이... 공부라고 여기며..
오늘도 삶으로 정진여^^ 감사합니다~^^♡
iris2024-09-13 23:36
사실은 바로 지금 당신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여기에 곧장 드러나 있고, 우리는 늘 이 진리와 함께 있다.
눈을 뜨고 마음을 열면 길은 있다.
진리의 말씀 감사합니다🧡
비오는날 산책하다가 문득 어떤 깨달음이 있었는데요
잎맥처럼 미세하게 형성된 모든 고통의 시냅스들이
문득 전환의 순간, 하느님의 무한대의 축복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와, 고통이 만들어낸 연결망에 단 하나의 손실없이 그대로 담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라는 말씀의 진리를 체감할 수 있었는데요
고성제와 집성제는 멸성제와 도성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토대이며, 아버지는 단 한 순간의 예외없이, 모든 고통의 순간에
늘 나와 함께 계셨구나하는 깨달음
고통이 집적되었던 회로는 저주나 절망이 아닌
이 무한한 축복을 받기 위한 사전작업의 통로였구나 하는 각성이 있었습니다
진실한 마음이 있는 그 곳에 하느님은 늘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불상이든 십자가이든
진실로 구하는 마음 안에 있을 때
모든 곳에서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에 곧장 드러나 있고, 우리는 늘 이 진리와 함께 있다.
눈을 뜨고 마음을 열면 길은 있다.
진리의 말씀 감사합니다🧡
비오는날 산책하다가 문득 어떤 깨달음이 있었는데요
잎맥처럼 미세하게 형성된 모든 고통의 시냅스들이
문득 전환의 순간, 하느님의 무한대의 축복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와, 고통이 만들어낸 연결망에 단 하나의 손실없이 그대로 담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라는 말씀의 진리를 체감할 수 있었는데요
고성제와 집성제는 멸성제와 도성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토대이며, 아버지는 단 한 순간의 예외없이, 모든 고통의 순간에
늘 나와 함께 계셨구나하는 깨달음
고통이 집적되었던 회로는 저주나 절망이 아닌
이 무한한 축복을 받기 위한 사전작업의 통로였구나 하는 각성이 있었습니다
진실한 마음이 있는 그 곳에 하느님은 늘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불상이든 십자가이든
진실로 구하는 마음 안에 있을 때
모든 곳에서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멸(滅)이란, ‘니르바나’의 음역으로,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하며, 흔히 ‘열반(涅槃)’이라 표현한다. 다시 말해, 괴로움의 원인인 온갖 번뇌의 불길이 모두 꺼진 상태, 즉, 고(苦)가 소멸된 상태다.
집성제는,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을 고찰해 십이지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 근본원인이 무명(無明)이라고 관찰한 것이다. 그렇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멸성제는 어떻게 하면 될까?
불교는 현상계가 ‘괴롭다’라고 하여, 그 원인을 밝히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는 않는다. 괴로움의 원인을 밝힌 것은, 그 원인을 제거하여 괴로움이 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 작업일 뿐이다.
집성제인 괴로움의 원인을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통해 살펴보았다면, 멸성제에서는 그 십이연기의 지분을 소멸시켜 나가는 환멸문을 통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노병사의 괴로움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생(生)을 멸해야 하고, 생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유(有)를 멸해야 하고, 유를 멸하기 위해 취(取)를 멸해야 하고, 이렇게 해서, 결국에는 무명(無明)을 멸하면 괴로움의 모든 고리가 풀려서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의 상태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십이연기의 환멸문(還滅門)’이라 하며, 이렇게 노사에서부터 무명까지 역으로 관찰하는 관법이 바로 역관(逆觀)이다. 이렇듯 십이연기 환멸문의 역관이 바로 멸성제인 것이다. 그렇기에 멸성제는 다른 말로,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지분이 모두 소멸된 경지이기 때문에 열반이라고도 표현된다.
멸성제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될 수 있으며,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되면 열반에 이를 수 있음을 설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곧 멸성제다.
이 멸성제는 우리에게 깨달음의 가능성과 고를 소멸할 수 있는 가능성에 눈뜨게 한다. 누구나 고를 소멸하고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교리적인 확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그런 것이 아니다. 멸성제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자신에게 바로 멸성제의 삶으로 곧장 뛰어들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멸성제는 교리이거나, 이상이거나, 큰스님이나 부처님만 갈 수 있는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바로 지금 당신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여기에 곧장 드러나 있고, 우리는 늘 이 진리와 함께 있다. 용기를 잃지 말고, 저 멀리 있는 것이라고 여기지 말고, 내가 이번 생에 끝끝내 멸성제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을 일으켜 보라. 분명히 길은 있다.
지금 이 순간도 멸성제에 이른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확신한다! 이제 바로 당신이 이 자리에 이를 차례다. 눈을 뜨고 마음을 열면 길은 있다.
이러한 열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살아있는 동안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 즉, 육신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 하여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하고,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 한다.
후자는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므로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苦)가 모두 소멸된 열반의 경지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