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보된 법의 자리를 잘 지키는 수행이 남아 있으니
2025-06-05
조회수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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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럭키2025-06-06 00:32
이것 아닌 이것은 불이법입니다.
내가 생기는 순간 이법이 됩니다.
둘로 쪼개지면 괴로워 집니다.
둘로 쪼개지도 않고 나도 없다면 어떨까요..
둘이나 나라는 생각이 없으면 어떨까요..
오늘 간만에 산을 다녀왔는데 아무생각 없이 무위자연을 바라보았습니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고 너무나 평화로웠습니다.
선지식께 법문을 청할 뿐입니다.
내가 생기는 순간 이법이 됩니다.
둘로 쪼개지면 괴로워 집니다.
둘로 쪼개지도 않고 나도 없다면 어떨까요..
둘이나 나라는 생각이 없으면 어떨까요..
오늘 간만에 산을 다녀왔는데 아무생각 없이 무위자연을 바라보았습니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고 너무나 평화로웠습니다.
선지식께 법문을 청할 뿐입니다.
iris2025-06-05 23:40
하느님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본 전제가 겸손인데요
완전히 비울 때 채워질 수 있음이 진리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된 것은 너희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져 주어진 것이라는 말씀도, 불성은 원래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부처님 말씀과 그대로 통하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글 감사합니다❤️
완전히 비울 때 채워질 수 있음이 진리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된 것은 너희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져 주어진 것이라는 말씀도, 불성은 원래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부처님 말씀과 그대로 통하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글 감사합니다❤️


수행자라면 돈오 이후에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깨달았다는 상에 빠져 지낼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겸손하게 낮추며 하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 돈오를 겸손한 말로 표현해 ‘해오’라고 하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
여전히 온 몸으로 완전하게 증득된 깨달음은 아직 아니라는 것이다.
여전히 해야 할 공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체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체험 보다 이해가 앞서기 때문이다.
근본에서 본다면 해오가 돈오이기 때문에 더 이상 더 해야 할 공부는 없는 것이지만,
중생의 업습의 측면에서 본다면, 여전히 업습에 끌려다니기 때문에 더욱 확보된 법의 자리를 잘 지키는 수행이 남았으니, 아직 섣부르게 깨달았다는 말을 하기에는 이르다.
그렇더라도 근본에서는 차례를 뛰어넘어 곧바로 ‘이 자리’를 확인한 것이기에 ‘돈(頓)’이라 한다.
이 법의 자리에 대한 굳은 믿음이라는 원인이 결국 부처의 공덕이라는 결과와 둘이 아니어서,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비로소 참된 믿음을 이룰 수 있다.
굳게 믿는다면 그것이 곧 본래부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다르다면 그것은 불이법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믿음이다.
내가 지금 이대로 본래 부처라는 믿음, 그것이 곧 부처라는 결과와 둘이 아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