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라고 하는 자비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라는 것은 둘로 나누어 놓고 그 중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온전한 동체대비의 사랑이 아니지요.
동체대비라는 말 자체가, 동체(同體), 같은 몸이라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여러분과 내가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동체, 바로 내 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이 진정한 사랑, 진정한 자비라는 것은 온 우주를 하나 거르지 않고 모조리 사랑하는 것이지, 어떤 것은 사랑하고 어떤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적인 사랑이 아니다, 조건부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분별이 없고 차별이 없는, 해석이 없고 심판이 없는 사랑입니다.
보통 우리는 사랑을 한다고 할 때 나라는 상에 갇힌 사랑을 하곤 합니다. 사랑하면서도 ‘나’가 중심이 되어, 내 사랑이 중요하지, 나를 내려놓고 사랑하는 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무아와 이타적 사랑이 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사랑이 깊어 가면 갈수록 사실 그 이면에는 증오와 미움도 동시에 깊어지게 됩니다. 너무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나거나 바람이 난다고 했을 때, 조금 사랑했던 사람보다, 내가 정말 믿었고 사랑했던 사람일수록 더 큰 충격을 받고, 더 복수를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온전히 사랑할 뿐이라면, 내가 이만큼 사랑했으니까 이만큼 사랑 받겠지 라는 계산이 깔리지 않을 것입니다. 온전히 베푸는 사랑을 한다면 그냥 줬을 뿐이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되돌려주지 않더라도 그것이 억울하거나, 원망스럽지 않게 될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가를 살펴보려면, 여기에 분별심에 의한 사랑이냐, 차별심에 의한 사랑이냐, 아니면 무분별에 의한 무차별에 의한 사랑이냐를 알아야 된다는 말이죠.
차별이 생기면 좋고 나쁜 게 생긴단 말이에요. 좋고 나쁜 게 생기면 좋은 것은 내 편이 되고, 나쁜 것은 적이 된다 말이죠. 적과 아군이 생겨요.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적과 아군이 생기면 어떻게 되겠어요? 서로 싸우게 됩니다. 다투게 돼요.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차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만 볼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완벽한 사랑 그 자체입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바라볼 때, 사랑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보살의 사랑과는 조금 다른 사랑입니다. 자식을 바라볼 때 사랑하는 눈빛으로는 바라보거든요. 그런데 그 눈빛은 ‘내 자식’이라고 하는 아상이 개입된 사랑입니다. 완전한 무차별심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내 자식은 한없이 사랑하거든요. 그 때는 완전한 사랑 같아요. 그런데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싸움이 붙었어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무조건 내 자식 편을 들거든요. 내 자식이 조금 잘못한 것 같아도, 내 자식의 편을 든다는 말이죠. 그건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나누는 차별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다만 ‘내 것’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이고, 아상, 에고가 개입된 사랑인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라면 상대방과 나를 함께 사랑합니다. 남의 자식과 내 자식을 둘로 나누지 않고 그 모두를 사랑하는 거예요. 네 것과 내 것, 네 편과 내편, 내 가족과 다른 가족, 이렇게 둘로 나누는 차별심이 있는 마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과연 나는 진정으로 나 자신을, 내 가족을, 이웃을, 이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를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도 둘로 나누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게 됩니다.
글쓴이:법상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라고 하는 자비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라는 것은 둘로 나누어 놓고 그 중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온전한 동체대비의 사랑이 아니지요.
동체대비라는 말 자체가, 동체(同體), 같은 몸이라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여러분과 내가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동체, 바로 내 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이 진정한 사랑, 진정한 자비라는 것은 온 우주를 하나 거르지 않고 모조리 사랑하는 것이지, 어떤 것은 사랑하고 어떤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적인 사랑이 아니다, 조건부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분별이 없고 차별이 없는, 해석이 없고 심판이 없는 사랑입니다.
보통 우리는 사랑을 한다고 할 때 나라는 상에 갇힌 사랑을 하곤 합니다. 사랑하면서도 ‘나’가 중심이 되어, 내 사랑이 중요하지, 나를 내려놓고 사랑하는 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무아와 이타적 사랑이 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사랑이 깊어 가면 갈수록 사실 그 이면에는 증오와 미움도 동시에 깊어지게 됩니다. 너무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나거나 바람이 난다고 했을 때, 조금 사랑했던 사람보다, 내가 정말 믿었고 사랑했던 사람일수록 더 큰 충격을 받고, 더 복수를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온전히 사랑할 뿐이라면, 내가 이만큼 사랑했으니까 이만큼 사랑 받겠지 라는 계산이 깔리지 않을 것입니다. 온전히 베푸는 사랑을 한다면 그냥 줬을 뿐이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되돌려주지 않더라도 그것이 억울하거나, 원망스럽지 않게 될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가를 살펴보려면, 여기에 분별심에 의한 사랑이냐, 차별심에 의한 사랑이냐, 아니면 무분별에 의한 무차별에 의한 사랑이냐를 알아야 된다는 말이죠.
차별이 생기면 좋고 나쁜 게 생긴단 말이에요. 좋고 나쁜 게 생기면 좋은 것은 내 편이 되고, 나쁜 것은 적이 된다 말이죠. 적과 아군이 생겨요.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적과 아군이 생기면 어떻게 되겠어요? 서로 싸우게 됩니다. 다투게 돼요.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차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만 볼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완벽한 사랑 그 자체입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바라볼 때, 사랑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보살의 사랑과는 조금 다른 사랑입니다. 자식을 바라볼 때 사랑하는 눈빛으로는 바라보거든요. 그런데 그 눈빛은 ‘내 자식’이라고 하는 아상이 개입된 사랑입니다. 완전한 무차별심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내 자식은 한없이 사랑하거든요. 그 때는 완전한 사랑 같아요. 그런데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싸움이 붙었어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무조건 내 자식 편을 들거든요. 내 자식이 조금 잘못한 것 같아도, 내 자식의 편을 든다는 말이죠. 그건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나누는 차별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다만 ‘내 것’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이고, 아상, 에고가 개입된 사랑인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라면 상대방과 나를 함께 사랑합니다. 남의 자식과 내 자식을 둘로 나누지 않고 그 모두를 사랑하는 거예요. 네 것과 내 것, 네 편과 내편, 내 가족과 다른 가족, 이렇게 둘로 나누는 차별심이 있는 마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과연 나는 진정으로 나 자신을, 내 가족을, 이웃을, 이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를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도 둘로 나누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게 됩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