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을 허용하기만하면, 해석하고 분별하지 않고 허용하기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허용하는 순간 동안은 계속해서 내가 고요해집니다. 원융자재해 지고 제법이 부동해서 본래적이 됩니다. 누구와도 싸우고 시비 붙으려고 하지 않아요.
제법은 본래부터 고요합니다. 남들이 나한테 욕을 할 때나 안 할 때나 언제나 고요합니다. 상대방이 나를 욕했지만, 그건 그 사람이 욕한 걸 내가 분별로써 반응하니까 망상으로 괴로울 뿐인 겁니다. 환상으로 반응하고 환상으로 괴로울 뿐입니다. 환상으로 괴로움이라고 해석하고 환상으로 괴로움 속에 빠져서 환상으로 괴로워하는 것뿐입니다. 내 망념, 내 분별심속에서.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속에 스스로 빠진거죠.
그런데 사실 욕을 얻어 먹은 순간에도 본성은 그저 움직임이 없고 고요합니다. 아무 일도 없어요. 실제 남들이 내게 욕했지만 아무 일 없듯이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바로 그 때가 둘로 나누지 않는 본래 고요한 본연의 상태입니다.
그러니 상대가 나한테 욕을 했어도 사실은 욕한 게 아닙니다. 그저 내가 그 욕에 반응했을 뿐이지, 그 사람이 내게 욕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둘로 나누는 마음만 없으면 언제나 그 자리가 부동해서 본래적입니다. 움직이는 바도 없고 그 자리가 이미 적적하고 고요하여, 단 한 번도 고요속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일어나더라도 내 마음속에서 마음을 고요히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그것을 대응할 수 있다면,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면, 의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면, 분별심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걸 다 하면서도 거기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법성이라는 본연의 자리에 서 있게 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명상이고 참선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한 번 허용해보세요. 내가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모든 걸 허용해보겠다 하고 일어나는 걸 허용해보는 거예요. 그럼 우린 한 시간 동안, 우린 깊은 명상에 잠기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허용의 힘이 커지게 되면 벌어지는 족족 다 허용하게 됩니다. 그냥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허용하는 힘이 커집니다. 삶을 향해 완전히 가슴이 확 열리게 되요. 어느 것 하나 닫아놓지 않고 다 받아들이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입처개진, 제법실상의 진실의 세계에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활짝 열리니까 진리가 분별심에 장애받지 않고 고스란히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진리는 언제나 나를 향해 노크하고 있는데, 내가 선택분별해가지고 요것만 받아들이고 저 건 밀쳐내는 습관을 계속가지고 있었다보니 진리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허용하는 순간 이 모든 게 다 들어오기 시작한단 말이에요. 해석, 분별에 막히지 않고 다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런 순간 갑자기 닫혔던 문이 확 열리면서 진리 그 자체가 그냥 확! 확인이 될 수 있단 말이죠. 견성이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경험을 표현하는 방편의 말인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공부나 참선이라는 것은 불이법으로 분별없이 허용하는 순간 일어나는 것이지, 뭐 가부좌 틀고 오래 앉아 있어야지만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내가 이 습관적인 분별심을 어느 순간 탁! 놓아서 온전히 허용이 되느냐? 하는게 중요한 겁니다. 허용한다는 말은 분별하지 않는다는 말이라고 했어요. 분별하지 않는 그 의식에 딱! 일치가 되느냐? 거기에 따라 진리가 일순간 드러나는 거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허용, 수용은 거부에 반대되는 의미로써의 수용이 아닙니다. 거부와 수용 중 수용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의 온전한 있는 그대로의 수용을 말합니다.
글쓴이:법상
내 삶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을 허용하기만하면, 해석하고 분별하지 않고 허용하기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허용하는 순간 동안은 계속해서 내가 고요해집니다. 원융자재해 지고 제법이 부동해서 본래적이 됩니다. 누구와도 싸우고 시비 붙으려고 하지 않아요.
제법은 본래부터 고요합니다. 남들이 나한테 욕을 할 때나 안 할 때나 언제나 고요합니다. 상대방이 나를 욕했지만, 그건 그 사람이 욕한 걸 내가 분별로써 반응하니까 망상으로 괴로울 뿐인 겁니다. 환상으로 반응하고 환상으로 괴로울 뿐입니다. 환상으로 괴로움이라고 해석하고 환상으로 괴로움 속에 빠져서 환상으로 괴로워하는 것뿐입니다. 내 망념, 내 분별심속에서.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속에 스스로 빠진거죠.
그런데 사실 욕을 얻어 먹은 순간에도 본성은 그저 움직임이 없고 고요합니다. 아무 일도 없어요. 실제 남들이 내게 욕했지만 아무 일 없듯이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바로 그 때가 둘로 나누지 않는 본래 고요한 본연의 상태입니다.
그러니 상대가 나한테 욕을 했어도 사실은 욕한 게 아닙니다. 그저 내가 그 욕에 반응했을 뿐이지, 그 사람이 내게 욕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둘로 나누는 마음만 없으면 언제나 그 자리가 부동해서 본래적입니다. 움직이는 바도 없고 그 자리가 이미 적적하고 고요하여, 단 한 번도 고요속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일어나더라도 내 마음속에서 마음을 고요히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그것을 대응할 수 있다면,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면, 의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면, 분별심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걸 다 하면서도 거기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법성이라는 본연의 자리에 서 있게 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명상이고 참선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한 번 허용해보세요. 내가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모든 걸 허용해보겠다 하고 일어나는 걸 허용해보는 거예요. 그럼 우린 한 시간 동안, 우린 깊은 명상에 잠기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허용의 힘이 커지게 되면 벌어지는 족족 다 허용하게 됩니다. 그냥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허용하는 힘이 커집니다. 삶을 향해 완전히 가슴이 확 열리게 되요. 어느 것 하나 닫아놓지 않고 다 받아들이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입처개진, 제법실상의 진실의 세계에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활짝 열리니까 진리가 분별심에 장애받지 않고 고스란히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진리는 언제나 나를 향해 노크하고 있는데, 내가 선택분별해가지고 요것만 받아들이고 저 건 밀쳐내는 습관을 계속가지고 있었다보니 진리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허용하는 순간 이 모든 게 다 들어오기 시작한단 말이에요. 해석, 분별에 막히지 않고 다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런 순간 갑자기 닫혔던 문이 확 열리면서 진리 그 자체가 그냥 확! 확인이 될 수 있단 말이죠. 견성이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경험을 표현하는 방편의 말인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공부나 참선이라는 것은 불이법으로 분별없이 허용하는 순간 일어나는 것이지, 뭐 가부좌 틀고 오래 앉아 있어야지만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내가 이 습관적인 분별심을 어느 순간 탁! 놓아서 온전히 허용이 되느냐? 하는게 중요한 겁니다. 허용한다는 말은 분별하지 않는다는 말이라고 했어요. 분별하지 않는 그 의식에 딱! 일치가 되느냐? 거기에 따라 진리가 일순간 드러나는 거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허용, 수용은 거부에 반대되는 의미로써의 수용이 아닙니다. 거부와 수용 중 수용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의 온전한 있는 그대로의 수용을 말합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