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수업] 두려워서하는가 사랑해서하는가
2024-09-14
조회수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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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is2024-09-15 00:20
행동 뒤에 있는 의도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얼마나 지혜롭고,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진리와 하나가 되어 있는지를 알려주는 단서가 될 것이다.
지혜의 말씀 감사합니다🧡
얼마나 지혜롭고,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진리와 하나가 되어 있는지를 알려주는 단서가 될 것이다.
지혜의 말씀 감사합니다🧡
KK럭키2024-09-14 22:17
겉모양에 끄달린채 나오는 것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참된 것이 아닐까요.
경계로부터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수많은 가르침과 책, 매스컴을 접하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합리화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게 됩니다.
문득 어떤 선지식께서 남기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책이나 선생이나 어디서 들은 얘기 말고 진짜 너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해보거라"
이 말씀을 접하는 순간 숨이 턱 막혔습니다.
아무 답도 할 수가 없었고 은산철벽 앞에 막혀 그저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수십 년간 바깥 경계만 보고 살았을 뿐, 실상은 그저 모를 뿐이었습니다.
지금 여기도 모를 뿐, 인연 따라 살 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여기에서는 모를 뿐인 것을 안다는 그놈이 안심 될 뿐입니다.
시절 인연이 되어 바른 선지식을 만나게 되었음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바른 가르침 수희찬탄합니다.
일체 모두를 예경제불합니다.
경계로부터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수많은 가르침과 책, 매스컴을 접하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합리화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게 됩니다.
문득 어떤 선지식께서 남기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책이나 선생이나 어디서 들은 얘기 말고 진짜 너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해보거라"
이 말씀을 접하는 순간 숨이 턱 막혔습니다.
아무 답도 할 수가 없었고 은산철벽 앞에 막혀 그저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수십 년간 바깥 경계만 보고 살았을 뿐, 실상은 그저 모를 뿐이었습니다.
지금 여기도 모를 뿐, 인연 따라 살 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여기에서는 모를 뿐인 것을 안다는 그놈이 안심 될 뿐입니다.
시절 인연이 되어 바른 선지식을 만나게 되었음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바른 가르침 수희찬탄합니다.
일체 모두를 예경제불합니다.
보통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근원을 면밀히 살펴보면 ‘두려워서 하는 행동’이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대부분 두려움에서 나온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안 하면 나중에 불편하니까,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니까 하는 것이다. 돈을 번다는 행위 또한 그 이면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남들 다 버니까, 나만 안 벌면 뒤쳐질 수 있으니까, 가난해질 수 있으니까 두려워서 돈을 버는 것이다. 공부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대인관계를 넓히는 것도 대부분 두렵기 때문에 한다.
그런데 ‘누구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났다’면 이것은 사랑과 자비에서 나오는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내 근원에 있는 본질적인 참 불성(佛性), 신성(神性)에서 나온 행동이다. 둘이 아닌 무한한 자비로움이 우리의 근원이고 그곳에서 나온 행동이 ‘도와주어야 겠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이 자리에서는 네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너이기에 돕는다는 생각도 없이 저절로 주게 되어 있다. 입이 심심할 때 끊임없이 손은 먹을 것을 넣어주지만 손이 입에게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온 우주와 일체 모든 존재는 근원에서 둘이 아닌 불이법의 존재이기에, 우리의 가장 근원에서는 늘 자연스럽게 돕는다. 도우면서도 돕는다는 생각이 없이 돕는다. 돕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돕는 행위가 너무나도 당연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 근원에서 나온 돕겠다는 진리의 생각이 곧 두려움으로 바뀐다. ‘이걸 나누어 주고 나면 나는 뭐 먹고 살지?’ 하는 생각과 분별이 생긴다. 너와 나가 둘로 나뉠 때 두려움도 함께 생겨난다. 지혜를 깨닫지 못할 때는 이처럼 언제나 두려움은 함께 한다.
똑같은 행동도 때에 따라서 두려워서 하는 행동이 있고 사랑해서 하는 행동이 있다. 부모님께 자주 찾아가고 효도하는 것은 어떨까? 대부분은 부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효도를 하고 자주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린다. 그 모든 행동의 동기는 사랑과 자비에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랑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효자라는 말 들을까봐 또는 너무 오래 안 찾아뵈었더니 왠지 모르게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심지어 훗날 재산을 못 받게 될까봐 찾아뵙기도 한다.
누군가를 돕는 행동도 마찬가지다. 진정 그를 사랑해서 돕기도 하지만, 돕지 않으면 위치상 왠지 욕 얻어먹을 것 같은 두려움에 하기도 한다. 절에 가고 교회에 가는 것은 어떨까? 더 많은 사랑을 배우게 되고, 지혜와 자비가 가득한 곳이기에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옥에 갈까봐, 부처님이나 하느님께서 나를 미워할까봐, 심지어는 남들 다 하는 종교생활을 나만 안 하면 뒤처지거나 왕따가 될까봐 두려워서 가기도 한다.
모든 행동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의도가 중요하다. 불교의 업사상 또한 같은 행위를 했더라도 어떤 의도로 했느냐에 따라 선의 과보를 받을지 악의 과보를 받을지가 결정된다. 거짓말 한 행동은 나쁘지만, 그 의도가 좋았다면 오히려 선업을 받게 될 것이다.
이처럼 행동 뒤에 있는 의도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그것이 중요하다. 나의 행동은 두려움에 입각한 것이 많은지, 진심 사랑인지 살펴보라. 내가 얼마나 지혜롭고,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진리와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인지를 알려주는 하나의 단서가 될 것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