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에서는 무심(無心)의 도리가 아주 중요하게 읽힌다. 선에서는 본래면목, 주인공, 불성, 자성을 설한다. 이 본래면목을 주로 선에서 ‘법’ 혹은 ‘마음’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선수행을 하는 이들의 지상목표는 바로 이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 마음을 깨닫는 것, 자신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라고 해서 견성이라 한다.
이처럼 선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으라고 말한다. 이렇게 방편으로 설하다보니 사람들은 본래면목이나 마음, 불성이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래서 수많은 선사들은 끊임없이 본래무일물을 설하고, 얻을 법은 하나도 없음을 설하며, 달마 또한 무심을 설한다.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고 여기는 본래면목, 불성, 마음은 실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로만 존재하는 허구요 방편일 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진짜는 달에 있지 손가락은 달이 아니듯, 불성, 본래면목, 마음이라는 언어는 방편이며 가짜이고, 가명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언제나 화두의 낙처가 어디냐를 중요시 여긴다. 귀결점이 어디냐가 중요하지, 손가락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낙처, 귀결점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손으로 붙잡아 만질 수도 없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즉 우리들이 세상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소통창구인 안이비설신의 육근의 대상인 육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마음, 본래면목, 불성은 육근의 대상도 육식이라는 인식의 대상도 아니다. 육근과 육식으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즉, 아예 범주가 다른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육근과 육식으로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유위법적인 모든 노력들은 이 마음공부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이것은 무위법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불성, 본래면목, 마음은 우리가 붙잡거나, 얻거나, 만지거나,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없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래서 무심론에서는 ‘비록 마음은 없으나 비추고 작용할 줄 알고 비추고 작용함이 늘 고요한 것이 곧 여여다’라고 했고, ‘무릇 마음 없는 것이 곧 참마음이고, 참마음이 곧 마음 없음’이라고 했다.
법구경에서는 ‘만약 얻을 마음이 없음을 안다면 법도 얻을 수 없고, 죄와 복도 얻을 수 없고, 생사와 열반도 얻을 수 없고, 나아가 얻을 수 있는 어떤 것도 전혀 없고, 얻을 수 없음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즉 마음을 깨달으라고 할 때 이 마음은 곧 마음없음과 동의어다. 마음을 깨달으라는 말은 곧 마음 없음, 즉 무심을 깨달으라는 말이다.
선어록을 읽거나, 불성, 혹은 본래면목, 마음이라는 용어를 만날 때 우리는 곧장 생각으로 헤아려서 불성이나 본래면목이라는 어떤 실체적인 것을 붙잡거나, 찾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붙잡아지거나 찾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성은 ‘불성이 없음’으로 읽어야 하고, 본래면목은 ‘본래면목 없음’으로 읽어야 하고, 마음은 ‘마음 없음’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서 무심론에서는 ‘다만 모든 일 위에서 마음 없음을 깨달으면, 이것이 곧 수행이고 다시 다른 수행은 없다’고 했고, 마음 없음이 모든 것이고 적멸이 곧 마음 없음임을 알라고 했다.
불성, 본래면목, 마음에 대한 그 어떤 상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깨달음에 대한 그 어떤 상도 가지지 말라. 선불교가 참나, 마음, 본래면목을 말한다고 해서 초기불교의 무아와 어긋난다는 생각이야말로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선불교의 마음은 곧 마음없음이며, 참나는 곧 무아를 뜻한다.
글쓴이:법상
선에서는 무심(無心)의 도리가 아주 중요하게 읽힌다. 선에서는 본래면목, 주인공, 불성, 자성을 설한다. 이 본래면목을 주로 선에서 ‘법’ 혹은 ‘마음’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선수행을 하는 이들의 지상목표는 바로 이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 마음을 깨닫는 것, 자신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라고 해서 견성이라 한다.
이처럼 선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으라고 말한다. 이렇게 방편으로 설하다보니 사람들은 본래면목이나 마음, 불성이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래서 수많은 선사들은 끊임없이 본래무일물을 설하고, 얻을 법은 하나도 없음을 설하며, 달마 또한 무심을 설한다.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고 여기는 본래면목, 불성, 마음은 실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로만 존재하는 허구요 방편일 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진짜는 달에 있지 손가락은 달이 아니듯, 불성, 본래면목, 마음이라는 언어는 방편이며 가짜이고, 가명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언제나 화두의 낙처가 어디냐를 중요시 여긴다. 귀결점이 어디냐가 중요하지, 손가락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낙처, 귀결점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손으로 붙잡아 만질 수도 없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즉 우리들이 세상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소통창구인 안이비설신의 육근의 대상인 육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마음, 본래면목, 불성은 육근의 대상도 육식이라는 인식의 대상도 아니다. 육근과 육식으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즉, 아예 범주가 다른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육근과 육식으로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유위법적인 모든 노력들은 이 마음공부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이것은 무위법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불성, 본래면목, 마음은 우리가 붙잡거나, 얻거나, 만지거나,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없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래서 무심론에서는 ‘비록 마음은 없으나 비추고 작용할 줄 알고 비추고 작용함이 늘 고요한 것이 곧 여여다’라고 했고, ‘무릇 마음 없는 것이 곧 참마음이고, 참마음이 곧 마음 없음’이라고 했다.
법구경에서는 ‘만약 얻을 마음이 없음을 안다면 법도 얻을 수 없고, 죄와 복도 얻을 수 없고, 생사와 열반도 얻을 수 없고, 나아가 얻을 수 있는 어떤 것도 전혀 없고, 얻을 수 없음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즉 마음을 깨달으라고 할 때 이 마음은 곧 마음없음과 동의어다. 마음을 깨달으라는 말은 곧 마음 없음, 즉 무심을 깨달으라는 말이다.
선어록을 읽거나, 불성, 혹은 본래면목, 마음이라는 용어를 만날 때 우리는 곧장 생각으로 헤아려서 불성이나 본래면목이라는 어떤 실체적인 것을 붙잡거나, 찾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붙잡아지거나 찾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성은 ‘불성이 없음’으로 읽어야 하고, 본래면목은 ‘본래면목 없음’으로 읽어야 하고, 마음은 ‘마음 없음’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서 무심론에서는 ‘다만 모든 일 위에서 마음 없음을 깨달으면, 이것이 곧 수행이고 다시 다른 수행은 없다’고 했고, 마음 없음이 모든 것이고 적멸이 곧 마음 없음임을 알라고 했다.
불성, 본래면목, 마음에 대한 그 어떤 상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깨달음에 대한 그 어떤 상도 가지지 말라. 선불교가 참나, 마음, 본래면목을 말한다고 해서 초기불교의 무아와 어긋난다는 생각이야말로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선불교의 마음은 곧 마음없음이며, 참나는 곧 무아를 뜻한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