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신도님들 중에는 귀신이 보인다거나, 꿈 속에서 보인다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또 귀신이 나에게 붙을까봐 걱정하는 분들도 계시고, 밤에 가위에 눌리는 것으로 고민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설사 우리가 시쳇말로 하는 귀신이 내 안에 들어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바깥에 있는 귀신이 나를 지배하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 귀신을 내가 떼야 되는데’ 하는 그 문제가 아닙니다. 바깥에 있는 귀신과 나와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언제나 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내 안에서 그렇게 허하고, 그렇게 귀신을 끌어당길만한 그렇게 외부적인 어떤 존재에 휘둘릴만한 그런 나약하고 의존적인 마음상태에 있을 때는 그런 어떤 잡귀들도 더 달려오기가 쉽겠죠. 그러나 그렇지 않고 마음에 중심이 서 있게 된다면 그러한 것들이 나를 억누르지 못하고 휘두르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바깥에 실체적인 귀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즉, 귀신이 나에게 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 내부의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존재라는 것도 무아로써 실체가 아닌데,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물질세계 조차 실체가 아닌데, 귀신의 세계가 실체일 수 있겠습니까? 삶이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전부 다 삼계유심이요, 만법유식으로 마음의 세계일 뿐입니다.
가위에 잘 눌리는 사람도 어때요? 가위에 눌릴 때 무섭고 두려워서 겁을 내면서 빨리 없어지라고 하거나, 빨리 없애려고 힘을 주고 애를 쓰면 쓸수록 오히려 그 현상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힘을 빼고 “그래 니 맘대로 해라. 죽이든 살리는 맘대로 해라. 어차피 마음의 장난인데, 나를 어쩔 수야 있겠나. 난 모르겠다” 하면서 오히려 없애려고 애쓰고 버티던 마음을 탁 내려놓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금방 사라지게 됩니다.
모든 경계와 환상은 내 마음의 두려움을 먹고 자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두려워함으로써 두려워하는 대상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일 뿐이지요. 내가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운 대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만한 힘을 지닌 외부의 실체적 대상은 전혀 없기 때문이지요.
예전에 어떤 책에선가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어떤 사람이 귀신을 보는데 이 사람이 공동묘지에 갔습니다. 갔더니 온갖 귀신들이 막 떠들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자신이 오니까 귀신들이 ‘저기 사람이 온다’ 하면서 그리 크게 의미부여를 안 하면서 가볍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요.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귀신이 자신을 보고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갑자기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렇게 갑자기 무서워하면서 벌벌 떠니까 귀신들이 이러는 거죠.
“야, 쟤가 우리를 보나봐. 무서워하는 거 봐” 하면서 귀신들이 깜짝 놀라가지고 그 많은 귀신들이 전부 이 사람 가까이로 몰려드는 겁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오든말든 별 상관을 안 하다가 이 사람이 귀신을 보면서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귀신들이 몰려든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떤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리고서는 ‘그래! 이것도 또한 내 마음에서 내가 힘을 주지 않으면, 내가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어떤 귀신도 나를 휘잡을 수 없지’ 하는 마음으로 그냥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해라’ 하고 탁 내려놓으면서 제 갈길을 담담히 가는 순간, 갑자기 귀신들이 김이 빠져 흩어졌다고 해요. 이 사람이 갑자기 두려움이 없어지니까 재미가 없어지는 거죠.
그 어떤 경계가 온다 할지라도 거기에 내가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경계는 우리를 집어삼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보시 중에도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인 무외시가 중요하고, 관세음보살을 다른 이름으로 시무외자라고해서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살이라고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경계든 두려워하지 마세요. 내가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글쓴이:법상
가끔씩 신도님들 중에는 귀신이 보인다거나, 꿈 속에서 보인다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또 귀신이 나에게 붙을까봐 걱정하는 분들도 계시고, 밤에 가위에 눌리는 것으로 고민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설사 우리가 시쳇말로 하는 귀신이 내 안에 들어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바깥에 있는 귀신이 나를 지배하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 귀신을 내가 떼야 되는데’ 하는 그 문제가 아닙니다. 바깥에 있는 귀신과 나와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언제나 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내 안에서 그렇게 허하고, 그렇게 귀신을 끌어당길만한 그렇게 외부적인 어떤 존재에 휘둘릴만한 그런 나약하고 의존적인 마음상태에 있을 때는 그런 어떤 잡귀들도 더 달려오기가 쉽겠죠. 그러나 그렇지 않고 마음에 중심이 서 있게 된다면 그러한 것들이 나를 억누르지 못하고 휘두르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바깥에 실체적인 귀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즉, 귀신이 나에게 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 내부의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존재라는 것도 무아로써 실체가 아닌데,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물질세계 조차 실체가 아닌데, 귀신의 세계가 실체일 수 있겠습니까? 삶이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전부 다 삼계유심이요, 만법유식으로 마음의 세계일 뿐입니다.
가위에 잘 눌리는 사람도 어때요? 가위에 눌릴 때 무섭고 두려워서 겁을 내면서 빨리 없어지라고 하거나, 빨리 없애려고 힘을 주고 애를 쓰면 쓸수록 오히려 그 현상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힘을 빼고 “그래 니 맘대로 해라. 죽이든 살리는 맘대로 해라. 어차피 마음의 장난인데, 나를 어쩔 수야 있겠나. 난 모르겠다” 하면서 오히려 없애려고 애쓰고 버티던 마음을 탁 내려놓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금방 사라지게 됩니다.
모든 경계와 환상은 내 마음의 두려움을 먹고 자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두려워함으로써 두려워하는 대상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일 뿐이지요. 내가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운 대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만한 힘을 지닌 외부의 실체적 대상은 전혀 없기 때문이지요.
예전에 어떤 책에선가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어떤 사람이 귀신을 보는데 이 사람이 공동묘지에 갔습니다. 갔더니 온갖 귀신들이 막 떠들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자신이 오니까 귀신들이 ‘저기 사람이 온다’ 하면서 그리 크게 의미부여를 안 하면서 가볍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요.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귀신이 자신을 보고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갑자기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렇게 갑자기 무서워하면서 벌벌 떠니까 귀신들이 이러는 거죠.
“야, 쟤가 우리를 보나봐. 무서워하는 거 봐” 하면서 귀신들이 깜짝 놀라가지고 그 많은 귀신들이 전부 이 사람 가까이로 몰려드는 겁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오든말든 별 상관을 안 하다가 이 사람이 귀신을 보면서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귀신들이 몰려든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떤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리고서는 ‘그래! 이것도 또한 내 마음에서 내가 힘을 주지 않으면, 내가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어떤 귀신도 나를 휘잡을 수 없지’ 하는 마음으로 그냥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해라’ 하고 탁 내려놓으면서 제 갈길을 담담히 가는 순간, 갑자기 귀신들이 김이 빠져 흩어졌다고 해요. 이 사람이 갑자기 두려움이 없어지니까 재미가 없어지는 거죠.
그 어떤 경계가 온다 할지라도 거기에 내가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경계는 우리를 집어삼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보시 중에도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인 무외시가 중요하고, 관세음보살을 다른 이름으로 시무외자라고해서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살이라고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경계든 두려워하지 마세요. 내가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