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부터 화엄경의 핵심 사상을 의상스님께서 함축시켜 놓은 법성게의 가르침 가운데 중요한 부분들에 대해 때때로 조금씩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의상조사법성게의 첫 번째 게송이 바로 ‘법성원융무이상’입니다. 뜻을 해석해보면, ‘법성’은 원융해서 두 개의 상이 아니다 라는 얘긴데요, 이 ‘법성’이 뭔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또한 그에 앞서 ‘법’이 뭔지를 먼저 알아야 됩니다. 오늘은 법이라는 용어와 법성이라는 용어에 대해 조금 살펴볼까 합니다.
불교에서는 ‘법’이라는 용어를 두 가지 의미로 주로는 씁니다. 첫 번째는 ‘법’이라면 ‘존재’라는 의미로 쓰여요. ‘제법무아’ 이러면, ‘모든 존재는 실체가 있지 않다’ 이렇게 해석이 되죠. ‘삼법인’ 이러면 ‘세 가지 진리의 도장’, 이렇게 쓰입니다. 다시 말해서 ‘법’이라는 것은 존재라는 의미로 첫 번째로 쓰이고, 두 번째는 ‘진리’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첫 번째인 ‘존재’의 의미로 본다면, 두두만물 일체만유가 다 법이란 말이죠. 너도 법이고, 나도 법이고, 생물도, 살아있는 존재도 법이고, 눈에 드러나 있는 모든 존재가 전부 다 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라는 의미로, 우리말로 하면은 ‘어떤 것’, ‘것’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거죠.
법의 두 번째 의미는 ‘진리’를 의미하는데요, 사실 존재와 진리라는 이 두 가지는 사실은 서로 다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 바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일체 만유라는 모든 존재가 그대로 진리라는 것이지요. 진리가 곧 존재고, 존재가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가 죽비의 모습으로 드러나 있고, 뜰 앞에 잣나무로 드러나 있고, 나의 모습으로, 여러분의 모습으로, 바람의 모습으로, 구름의 모습으로, 모든 모습으로, 진리가 드러나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불교에서는 ‘세계다’라고 하지 않고 ‘법계다’ 이렇게 부릅니다.
이것을 ‘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이라고 해서, ‘모든 법은, 모든 존재는 그것 자체로 실상이다. 그것 자체로 진리의 참모습이다’, 이렇게 설했고, 선에서는 ‘입처개진’이다, ‘내가 서있는 그곳이 바로 참된 진리가 드러나 있는 곳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그대로 진리인줄 알아야한다는 것이죠.
그 다음에 법성은,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성품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성품이 뭘까요? 이 몸이나 육신은 껍데기이지 않습니까? 인연따라 잠깐 백년도 안되는 세월, 잠깐 우리가 빌려 쓰고 버리는 것일 뿐이지요. 정신도, 마음도, 느낌도, 감정도, 오온이 전부 다 개공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 대상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 즉 아상과 법상이 전부 아공 법공이라 했단 말이에요. 그렇게 비었다면 도대체 참성품은 뭐냐? 진짜 나의 본 모습은 뭐냐?는 것이죠.
물론 이 법성은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이름을 법성이라고 했을 뿐이지, 이름에 해당하는 어떤 사물이나 물건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모양 있는 어떤 것도 아니고, 있거나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닙니다. 쉽게 말해 우리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방편으로 이름 붙여서 법성이라고 부르고, 뭐 다르게 말한다면 불성이라고도 할 수 있고, 본래면목이라고도 할 수 있고, 뭐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고, 참나라고도 할 수 있고, 뭐 본지풍광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자성, 법, 마음, 일심, 자성청정심 등 뭐라고 해도 상관없단 말이죠.
또한 옛 선사스님들은 ‘뜰 앞의 잣나무’, ‘마른 똥막대기’ 이렇게도 표현을 했어요. 이 말은 뜰 앞의 잣나무에 어떤 법성이 드러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사물을 지칭함으로써 그 사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뜰 앞의 잣나무 속에 온 우주 전부를 한꺼번에 드러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진리를 그렇게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글쓴이:법상
오늘부터 화엄경의 핵심 사상을 의상스님께서 함축시켜 놓은 법성게의 가르침 가운데 중요한 부분들에 대해 때때로 조금씩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의상조사법성게의 첫 번째 게송이 바로 ‘법성원융무이상’입니다. 뜻을 해석해보면, ‘법성’은 원융해서 두 개의 상이 아니다 라는 얘긴데요, 이 ‘법성’이 뭔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또한 그에 앞서 ‘법’이 뭔지를 먼저 알아야 됩니다. 오늘은 법이라는 용어와 법성이라는 용어에 대해 조금 살펴볼까 합니다.
불교에서는 ‘법’이라는 용어를 두 가지 의미로 주로는 씁니다. 첫 번째는 ‘법’이라면 ‘존재’라는 의미로 쓰여요. ‘제법무아’ 이러면, ‘모든 존재는 실체가 있지 않다’ 이렇게 해석이 되죠. ‘삼법인’ 이러면 ‘세 가지 진리의 도장’, 이렇게 쓰입니다. 다시 말해서 ‘법’이라는 것은 존재라는 의미로 첫 번째로 쓰이고, 두 번째는 ‘진리’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첫 번째인 ‘존재’의 의미로 본다면, 두두만물 일체만유가 다 법이란 말이죠. 너도 법이고, 나도 법이고, 생물도, 살아있는 존재도 법이고, 눈에 드러나 있는 모든 존재가 전부 다 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라는 의미로, 우리말로 하면은 ‘어떤 것’, ‘것’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거죠.
법의 두 번째 의미는 ‘진리’를 의미하는데요, 사실 존재와 진리라는 이 두 가지는 사실은 서로 다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 바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일체 만유라는 모든 존재가 그대로 진리라는 것이지요. 진리가 곧 존재고, 존재가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가 죽비의 모습으로 드러나 있고, 뜰 앞에 잣나무로 드러나 있고, 나의 모습으로, 여러분의 모습으로, 바람의 모습으로, 구름의 모습으로, 모든 모습으로, 진리가 드러나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불교에서는 ‘세계다’라고 하지 않고 ‘법계다’ 이렇게 부릅니다.
이것을 ‘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이라고 해서, ‘모든 법은, 모든 존재는 그것 자체로 실상이다. 그것 자체로 진리의 참모습이다’, 이렇게 설했고, 선에서는 ‘입처개진’이다, ‘내가 서있는 그곳이 바로 참된 진리가 드러나 있는 곳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그대로 진리인줄 알아야한다는 것이죠.
그 다음에 법성은,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성품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성품이 뭘까요? 이 몸이나 육신은 껍데기이지 않습니까? 인연따라 잠깐 백년도 안되는 세월, 잠깐 우리가 빌려 쓰고 버리는 것일 뿐이지요. 정신도, 마음도, 느낌도, 감정도, 오온이 전부 다 개공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 대상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 즉 아상과 법상이 전부 아공 법공이라 했단 말이에요. 그렇게 비었다면 도대체 참성품은 뭐냐? 진짜 나의 본 모습은 뭐냐?는 것이죠.
물론 이 법성은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이름을 법성이라고 했을 뿐이지, 이름에 해당하는 어떤 사물이나 물건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모양 있는 어떤 것도 아니고, 있거나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닙니다. 쉽게 말해 우리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방편으로 이름 붙여서 법성이라고 부르고, 뭐 다르게 말한다면 불성이라고도 할 수 있고, 본래면목이라고도 할 수 있고, 뭐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고, 참나라고도 할 수 있고, 뭐 본지풍광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자성, 법, 마음, 일심, 자성청정심 등 뭐라고 해도 상관없단 말이죠.
또한 옛 선사스님들은 ‘뜰 앞의 잣나무’, ‘마른 똥막대기’ 이렇게도 표현을 했어요. 이 말은 뜰 앞의 잣나무에 어떤 법성이 드러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사물을 지칭함으로써 그 사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뜰 앞의 잣나무 속에 온 우주 전부를 한꺼번에 드러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진리를 그렇게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