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은 불이법이고, 둘로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편으로는 둘로 나누지 않는 것이다보니 이 진실의 자리를 ‘일심’, ‘한마음’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하나의 마음 뿐이라는 것이지요. 즉심시불이라고도 합니다. 그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해도 또 생각으로 헤아립니다. 내 마음 속에 어떤 불성이 있는가보다, 혹은 한마음이라는 어떤 것이 있는가보다 하고 그림을 그려서 헤아리려고 한단 말지이요. 그래서 그렇게도 안 하고 ‘이 자리’, ‘이 순간’ 혹은 그저 ‘이것’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이 자리 하면 어떤 공간인가 하고 헤아리고, 이 순간 하면 어떤 시간을 헤아리기 때문에 그저 ‘이것’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이는 마치 꿈과 비슷한데요, 꿈 속에서 우리가 여행가고, 먹고, 마시고, 놀고, 뛰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다 똑같은 ‘꿈’이라는 것 하나일 뿐입니다. 꿈 속에서 아무리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전부 하나의 꿈일 뿐이지요. 사실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 세상에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전부 다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꿈일 뿐이지요.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꿈 속에서는 내가 있고 남이 있고, 우리나라도 있고 다른 나라도 있고, 사람도 있고 짐승도 있을 수 있지만, 사실 꿈 깬 입장에서 본다면 그 모든 것은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닌 그저 하나의 꿈일 뿐입니다. 현실의 삶에서 우리가 너와 나를 나누고, 옳고 그르고를 나누고, 니 편 내 편을 나누는 등 끊임없이 분별하고 있지만 이 모두가 허망한 중생놀이일 뿐, 진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수행이며 참선을 이야기하는데, 사실 수행이나 참선은 둘로 나누지 않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생활 자체가 바로 참선인 것입니다. 앉아 있는 것만 참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벌써 모양 따라가서 앉고 서는 것을 둘로 나눠 놓는 것일 뿐이지요.
누가 나한테 욕했어요. 그 순간이 참선하는 순간입니다. 이 욕한 것을 보고, ‘저놈이 나를 무시했구나, 욕했구나, 네가 나이가 몇인데 나한테 욕을 하냐? 쟤가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기에 저러지?’하는 등의 온갖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벌써 둘로 셋으로 쪼개진 분별심일 뿐입니다. 너와 나를 분별하고, 나이가 많고 적음을 분별하고, 그 소리를 욕이라고 분별하고, 하는 등으로 계속 나누는 것인 겁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면, 그 사람이 내게 욕하고 우습게 본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떤 소리가 일어났을 뿐입니다. 그냥 소리가 났을 뿐인데 그것을 분별해서 저 사람이 나에게 욕하고 화냈다고 분별한 것이지요. 사실 어떤 말도 그 말 자체는 중립적인 소리에너지일 뿐입니다. 다만 내가 그 말을 좋거나 나쁜 것으로 해석하면서부터 분별되기에 문제가 생길 뿐인거지요. 그러니 이렇게 분별하지만 않는다면 남들이 나에게 욕하는 순간 자체가 불이법을 공부하는 순간이고, 그 때가 바로 참선입니다.
누가 나한테 욕하는 그 순간, 그것을 욕이라거니, 무시했다거니,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가보다라거나 하면서 해석하고 분별하지 마세요. 그저 그 소리가 이 공간 위에서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허용해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시비 걸지 않고 그저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한 것은 그 사람 사정이니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허용해주는 겁니다.
나도 내 마음을 통제 못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을 통제할 수 있겠어요. 통제하려는 욕구, 내 뜻대로 해 주기를 바라는 욕구, 좋은 말만 듣고 싶은 욕구 등을 그저 내려놓고 일어나는 것을 허용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이법의 실천이고, 그것이 바로 분별없는 알아차림이며, 참선이고 명상인 것입니다.
글쓴이:법상
불법은 불이법이고, 둘로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편으로는 둘로 나누지 않는 것이다보니 이 진실의 자리를 ‘일심’, ‘한마음’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하나의 마음 뿐이라는 것이지요. 즉심시불이라고도 합니다. 그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해도 또 생각으로 헤아립니다. 내 마음 속에 어떤 불성이 있는가보다, 혹은 한마음이라는 어떤 것이 있는가보다 하고 그림을 그려서 헤아리려고 한단 말지이요. 그래서 그렇게도 안 하고 ‘이 자리’, ‘이 순간’ 혹은 그저 ‘이것’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이 자리 하면 어떤 공간인가 하고 헤아리고, 이 순간 하면 어떤 시간을 헤아리기 때문에 그저 ‘이것’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이는 마치 꿈과 비슷한데요, 꿈 속에서 우리가 여행가고, 먹고, 마시고, 놀고, 뛰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다 똑같은 ‘꿈’이라는 것 하나일 뿐입니다. 꿈 속에서 아무리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전부 하나의 꿈일 뿐이지요. 사실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 세상에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전부 다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꿈일 뿐이지요.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꿈 속에서는 내가 있고 남이 있고, 우리나라도 있고 다른 나라도 있고, 사람도 있고 짐승도 있을 수 있지만, 사실 꿈 깬 입장에서 본다면 그 모든 것은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닌 그저 하나의 꿈일 뿐입니다. 현실의 삶에서 우리가 너와 나를 나누고, 옳고 그르고를 나누고, 니 편 내 편을 나누는 등 끊임없이 분별하고 있지만 이 모두가 허망한 중생놀이일 뿐, 진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수행이며 참선을 이야기하는데, 사실 수행이나 참선은 둘로 나누지 않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생활 자체가 바로 참선인 것입니다. 앉아 있는 것만 참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벌써 모양 따라가서 앉고 서는 것을 둘로 나눠 놓는 것일 뿐이지요.
누가 나한테 욕했어요. 그 순간이 참선하는 순간입니다. 이 욕한 것을 보고, ‘저놈이 나를 무시했구나, 욕했구나, 네가 나이가 몇인데 나한테 욕을 하냐? 쟤가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기에 저러지?’하는 등의 온갖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벌써 둘로 셋으로 쪼개진 분별심일 뿐입니다. 너와 나를 분별하고, 나이가 많고 적음을 분별하고, 그 소리를 욕이라고 분별하고, 하는 등으로 계속 나누는 것인 겁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면, 그 사람이 내게 욕하고 우습게 본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떤 소리가 일어났을 뿐입니다. 그냥 소리가 났을 뿐인데 그것을 분별해서 저 사람이 나에게 욕하고 화냈다고 분별한 것이지요. 사실 어떤 말도 그 말 자체는 중립적인 소리에너지일 뿐입니다. 다만 내가 그 말을 좋거나 나쁜 것으로 해석하면서부터 분별되기에 문제가 생길 뿐인거지요. 그러니 이렇게 분별하지만 않는다면 남들이 나에게 욕하는 순간 자체가 불이법을 공부하는 순간이고, 그 때가 바로 참선입니다.
누가 나한테 욕하는 그 순간, 그것을 욕이라거니, 무시했다거니,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가보다라거나 하면서 해석하고 분별하지 마세요. 그저 그 소리가 이 공간 위에서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허용해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시비 걸지 않고 그저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한 것은 그 사람 사정이니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허용해주는 겁니다.
나도 내 마음을 통제 못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을 통제할 수 있겠어요. 통제하려는 욕구, 내 뜻대로 해 주기를 바라는 욕구, 좋은 말만 듣고 싶은 욕구 등을 그저 내려놓고 일어나는 것을 허용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이법의 실천이고, 그것이 바로 분별없는 알아차림이며, 참선이고 명상인 것입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