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교리] 내가 있어 세계가 있다

202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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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처럼 육근이 청정하게 수호되어, 오염 없이 바라보게 되면 다만 ‘볼 뿐’이지,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을 나누는 분별도 쉬게 된다. 그저 볼 뿐, 내가 대상을 본다는 분별이 없다. 나와 경계를, 육근과 육경을 둘로 나누지 않는다.

두 개의 볏짚이 서로에게 기대어서만 설 수 있듯이, 육근과 육경은 서로를 인연으로 해서 있을 뿐, 독자적으로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를 때, 우리는 ‘내가’, ‘생각’을 한다고 여기면서, 나와 생각을 둘로 나누어 놓는다. 생각하는 나[의근]와 생각하는 것[법경]을 둘로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의근이 청정하면, 그저 하나의 생각이 인연 따라 불쑥 일어났다가 사라졌을 뿐이지, 나와 생각이 둘인 것은 아니다.

생각하는 나를 떠나 생각되는 것은 없고, 생각되는 것을 떠나 생각하는 나는 없다. 그 둘은 언제나 동시생 동시멸이며, 둘이 아닌 하나다. 연생(緣生), 즉 인연 따라 생겨났을 뿐이다. 그런데 연생은 무생(無生)이라는 말이 있다.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은 사실 생겨나되 생겨난 바가 없는 무아(無我)임을 뜻한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도, 들리는 소리를 떠나 듣는 내가 있을 수 없고, 듣는 나를 떠나 들리는 소리가 있을 수 없다. 본래 듣는 나도, 들리는 소리도 따로 없지만, 그 둘은 서로 인연이 화합할 때만 인연가합으로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렇듯 육근과 육경이 연기적으로만 있는 인연가합의 거짓된 것임을 안다면 육근이 청정해져 육경에 끌려가거나 휘둘리지 않겠지만, 육근이 오염되면 연기적으로 있는 것을 실재로 착각하여 육경에 끌려가게 된다. 스님들이 축원할 때, 육근청정을 발원하는 것 또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처럼 육근 육경의 가르침은 곧 연기법의 다른 버전이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나와 세계는 이처럼 인연 따라 생겨난다. 육근과 육경은 서로에게 기대어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기에, 그 둘은 사실 둘이 아니다.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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