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교리] 사성제(四聖諦)

202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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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에 대한 관찰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괴로운 일이 일어나는 순간, 고성제라고 관찰하고, 괴로움의 원인을 관찰하고,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관찰하는 것이다. 사성제에 대한 관찰이야말로 법념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된다. 사성제가 일체 모든 불법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사성제의 관찰 또한, 괴로움은 나쁜 것이니 고성제는 버리고, 멸성제는 좋은 것이니 멸성제는 취하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이 일어날 때 그 또한 법이기에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괴로움이 일어날 때 거기에 해석과 분별을 개입시켜서 버리려고 애쓰면 오히려 거부하는 것이 지속되지만, 괴로움이 일어날 때 그것을 법으로써 받아들여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알아차릴 때 그 허망한 괴로움은 사라져간다. 이처럼 괴로움도 똑같은 법이다.

그렇게 중도, 팔정도, 사념처를 통해 괴로움의 원인이 제거되고 멸성제에 이르렀거나, 칠각지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났을 때라도, 그것이 내가 그토록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집착하고 붙잡으려 하면 곧장 그것은 또 다시 분별법이 되어버린다. 해탈을 붙잡는 것 자체가 하나의 중생심이다. 해탈, 열반이든, 그 어떤 깨달음의 요소든 그저 알아차릴 뿐이다.

도성제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 또한 염각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저 알아차림이 일어남을 그저 알아차릴 뿐이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음을 그저 알아차릴 뿐이다. 이를 수행법화 시키고 체계화, 조직화 시켜서, 이것만이 깨달음에 이르게 해 주는 수행법이라고 규정 짓게 되면 그 또한 법의 지위를 잃게 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수행을 하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한다. 하되 함이 없이 하라고도 하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설한다. 어느 한 가지 수행법이나 방법론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니 이것이 곧 중도의 방식 아닌 방식이다. 길 없는 길이다.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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