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상세계에서 신들의 대화는 이런 식이라고 합니다.
‘자네, 지난 생 누구를 죽인 업보 받으러 다음 생에는 지구에 잠시 다녀오는게 낫지 않겠어?’
‘맞아, 어차피 한 번 받을건데, 이번 생에 빨리 다녀오는 것이 좋겠어. 어디로 갈까? 어차피 잠깐 다녀올건데, 아프리카에 다녀오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그것도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돌아가셔야 하는 조건이면 금상첨화일텐데. 그래야 부모님 마음 고생도 안 시켜드리지.’
이처럼 천상의 존재들은 가볍게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육신에 사로잡혀 있지 않으며, 생사를 관조해 볼 수 있는 상태에서는 죽고 사는 생사의 문제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살생이라는 업 또한 그다지 심각할 것은 없습니다. 죄의식과 두려움에서 놓여나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다시 환생을 해 인간계로 내려온다면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심각해지고, 괴로워하겠지만 말입니다.
이와 같이 근원에서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심지어 죽음에 대해서도 좋다거나 나쁘다고 해석하거나 판단할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다만 나에게 주어진 정확한 인과응보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지, 좋거나 나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삶은 언제나 중립입니다. 삶에 대해 이리저리 시비를 붙이고 따지려 드는 것은 언제나 삶 쪽이 아니라 우리 쪽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시비만 붙이지 않는다면 중립적인 삶은 언제나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를 돕고 있는 바로 그 고맙고 감사한 순간에도 감사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내며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살고 있을 수는 있지요. 그것도 내가 선택한 것일 뿐, 그렇게 원망하며 삶을 비관하는 그 순간에조차 사실 이 우주법계는 우리를 한결같이 자비로써 돕고 있습니다.
고맙게도 이 우주법계는 우리가 정확히 그 업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받을 수 있도록 업보를 보내줍니다. 우주법계는 항상 자비와 사랑의 관점에서 우리를 돕는 방향으로 과보를 보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말을 우주법계가 어떤 전지전능한 신이거나, 의도를 가진 존재라서 작위적으로 무언가 일을 벌이는 것을 잘못 해석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수행을 열심히 하고 뭔가 정진을 열심히 할 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면, 이는 우주법계에서 ‘이 사람이 지금은 수행력이 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구나’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 업보를 이겨낼 수 있기 때문에 보내주는 겁니다. 만약 그 사람이 훗날 수행도 안 하고, 여러모로 힘든 상황을 겪게 될 때 그 좋지 않은 상황이 생기게 된다면 더욱 이겨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방편으로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수행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꾸 나쁜 일만 일어날 수가 있지’ 하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데바닷다라고 하는 반역자가 있었고, 부처님 당시에 아라한과를 증득한 비구니 스님은 먼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한 경우도 있었고, 큰스님들의 일화를 보더라도 역경에 처하거나, 심지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거나, 살생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삶에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긴다고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괴롭고 힘든 것은 아닙니다.
겉모습만 보고 상대를 판단하지는 마십시오. 그는 지금 그 괴로운 일들을 통해 내면에서는 큰 성장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나 자신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그런 과정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쓴이:법상
천상세계에서 신들의 대화는 이런 식이라고 합니다.
‘자네, 지난 생 누구를 죽인 업보 받으러 다음 생에는 지구에 잠시 다녀오는게 낫지 않겠어?’
‘맞아, 어차피 한 번 받을건데, 이번 생에 빨리 다녀오는 것이 좋겠어. 어디로 갈까? 어차피 잠깐 다녀올건데, 아프리카에 다녀오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그것도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돌아가셔야 하는 조건이면 금상첨화일텐데. 그래야 부모님 마음 고생도 안 시켜드리지.’
이처럼 천상의 존재들은 가볍게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육신에 사로잡혀 있지 않으며, 생사를 관조해 볼 수 있는 상태에서는 죽고 사는 생사의 문제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살생이라는 업 또한 그다지 심각할 것은 없습니다. 죄의식과 두려움에서 놓여나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다시 환생을 해 인간계로 내려온다면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심각해지고, 괴로워하겠지만 말입니다.
이와 같이 근원에서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심지어 죽음에 대해서도 좋다거나 나쁘다고 해석하거나 판단할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다만 나에게 주어진 정확한 인과응보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지, 좋거나 나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삶은 언제나 중립입니다. 삶에 대해 이리저리 시비를 붙이고 따지려 드는 것은 언제나 삶 쪽이 아니라 우리 쪽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시비만 붙이지 않는다면 중립적인 삶은 언제나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를 돕고 있는 바로 그 고맙고 감사한 순간에도 감사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내며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살고 있을 수는 있지요. 그것도 내가 선택한 것일 뿐, 그렇게 원망하며 삶을 비관하는 그 순간에조차 사실 이 우주법계는 우리를 한결같이 자비로써 돕고 있습니다.
고맙게도 이 우주법계는 우리가 정확히 그 업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받을 수 있도록 업보를 보내줍니다. 우주법계는 항상 자비와 사랑의 관점에서 우리를 돕는 방향으로 과보를 보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말을 우주법계가 어떤 전지전능한 신이거나, 의도를 가진 존재라서 작위적으로 무언가 일을 벌이는 것을 잘못 해석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수행을 열심히 하고 뭔가 정진을 열심히 할 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면, 이는 우주법계에서 ‘이 사람이 지금은 수행력이 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구나’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 업보를 이겨낼 수 있기 때문에 보내주는 겁니다. 만약 그 사람이 훗날 수행도 안 하고, 여러모로 힘든 상황을 겪게 될 때 그 좋지 않은 상황이 생기게 된다면 더욱 이겨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방편으로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수행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꾸 나쁜 일만 일어날 수가 있지’ 하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데바닷다라고 하는 반역자가 있었고, 부처님 당시에 아라한과를 증득한 비구니 스님은 먼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한 경우도 있었고, 큰스님들의 일화를 보더라도 역경에 처하거나, 심지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거나, 살생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삶에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긴다고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괴롭고 힘든 것은 아닙니다.
겉모습만 보고 상대를 판단하지는 마십시오. 그는 지금 그 괴로운 일들을 통해 내면에서는 큰 성장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나 자신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그런 과정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