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방송 원고읽기] 분별하지 않으려면
2024-08-01
조회수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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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럭키2024-08-01 15:24
취부득 사부득.
그저 인연 따라 흘러갑니다. 가볍게 둥둥~
흘러가다 보면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고 꽃을 만나기도 하고
그저 모를 뿐.
언제 배에서 신호(?)가 올지도 그저 모를 뿐.
언제 신호등이 주황불로 바뀔지 그저 모를 뿐.
이 삶, 이 존재 자체가 그저 모를 뿐입니다.
모르는걸 알려고하니 필히 유위가 되겠지만
모르는걸 받아들이면 절로 무위가 되는듯이
그저 모를 뿐.
바른 가르침 수희찬탄 합니다.
그저 인연 따라 흘러갑니다. 가볍게 둥둥~
흘러가다 보면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고 꽃을 만나기도 하고
그저 모를 뿐.
언제 배에서 신호(?)가 올지도 그저 모를 뿐.
언제 신호등이 주황불로 바뀔지 그저 모를 뿐.
이 삶, 이 존재 자체가 그저 모를 뿐입니다.
모르는걸 알려고하니 필히 유위가 되겠지만
모르는걸 받아들이면 절로 무위가 되는듯이
그저 모를 뿐.
바른 가르침 수희찬탄 합니다.
봄봄🌸🌷2024-08-01 14:31
[벌어지는대로 내버려두니까 애쓰고 힘쓸 일이 없어요. 무위법이 됩니다.
바로 이럴 때, 아무 힘 들이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은 진리답게 돌아갑니다.
바로 그 때 분별이 놓이고 법성을 볼 시절인연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넵! 감사합니다아~^^
바로 이럴 때, 아무 힘 들이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은 진리답게 돌아갑니다.
바로 그 때 분별이 놓이고 법성을 볼 시절인연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넵! 감사합니다아~^^
법성게의 첫 게송에 법성원융무이상이라고 했는데요, 그러면 무이상, 즉 둘로 나누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법성원융무이상인데도 불구하고, 둘로 나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둘로 나눈단 말이에요. 좋은 것 싫은 것 나눈단 말이에요. 좋은 건 더 집착해서 내껄로 만들려고 하니까 괴로움이 생겨요. 싫은 건 거부하고, 밀쳐내고 싶은데 안 밀쳐지니까 화가 난단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둘로 나누지 않음을 실천하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실천되겠어요?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고 해석하고 분별하지 않고, 좋은 거라고 해서 더 집착해서 사로잡히지 않고, 빠져있지 않고, 그걸 붙잡으려 애쓰지 않고, 애착하고 집착해서 내껄로 만들려고 애쓰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싫은 것이 왔더라도 그것이 싫은지 안 싫은지 우린 알 수가 없잖아요. 모를 뿐이지 않습니까? 그게 진짜 나를 도우려고 왔는지 안도우려고 왔는지 우린 알 수 없단 말이죠. 그 ‘모른다’ 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됩니다.
교만하게 내가 다 알아. 나는 법을 알아, 나는 삶을 알아 하고 안다는 생각을 가지는 건 교만한 겁니다. ‘모른다’ 라는 마음으로 싫은 경계가 왔더라도 싫다고 해석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고, 밀쳐내려고 하지 않고, 버리려고 하지 않고, 화내지 않는단 말이죠.
즉 어떤 경계가 오더라도 처음에 일어나는 마음, 둘로 나누는 마음, 좋다고 집착하려고 하는 마음과 싫다고 거부하려고하는 마음, 이 두 가지를 탁! 멈춰버리는 겁니다. 둘로 나누는 애초의 그 싹을 딱! 끊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좋다 나쁘다 분별 자체를 하지 않고 보는 겁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어나는 모든 것을 허용한다는 얘깁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얘깁니다. 수용한다는 얘기예요.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허용한다라는 말은 해석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어떤 분은 허용하라고 하니까 막 허용하려고 애쓴단 말이에요. 수용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애쓰는 건 공부가 아닙니다. 수행이 아니에요. 공부는 애써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위법이라 그러잖아요.
물론 때로는 애쓰는 방편도 필요합니다. 처음에 공부할 때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애쓰는 방편도 필요한데, 진짜 공부는 애쓰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좋다고 생각해서 좋은 것 붙잡으려는 것은 애쓰는 거죠. 유위법입니다. 작의적인 거예요. 싫다고 해서 싫다고 해석하고 밀쳐내려고 하는 마음도 애쓰는 겁니다. 힘이 들어요. 힘 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무위법은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것은 좋다고 할 것도 없고 싫다고 해석할 것도 없어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요, 이 불법은 둘로 나누지 않는 법입니다. 무분별이지요. 분별, 차별하지말라는 것입니다.
왜 분별하지 말아야 할까요? 공이니까, 텅 빈 허공, 공한 거니까, 분별할 게 없으니까 분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무소득고라고 하죠. 본래 얻을 바가 없고,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어서 거기에서 뭔가를 잡으려고 하고 버리려고 할 게 없단 말이죠.
그래서 불법은 불이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이법을 실천하게 되면,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붙잡고 하나는 버리지 않게 되니까, 이 법을 잡지도 버리지도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참된 불이법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삶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 벌어지는 삶을 상대로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고 해석하지 않는 것이고, 좋다고 붙잡거나 싫다고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벌어지는대로 내버려두니까 애쓰고 힘쓸 일이 없어요. 무위법이 됩니다. 바로 이럴 때, 아무 힘 들이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은 진리답게 돌아갑니다.
바로 그 때 분별이 놓이고 법성을 볼 시절인연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