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능이 혜명에게 법을 설하는 내용에 주목해 보자.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그 때 어떤 것이 혜명 상좌의 본래면목인가?”
이 말 끝에 혜명은 언하대오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혜명은 이미 가슴 속에 자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발심이 익을 대로 익었고, 그 궁금증이 폭발 직전까지 와 있던 것이다.
오조스님 문하에서 충분히 공부가 되어 있었지만 시절인연과 기연(機緣)을 아직 맺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준비된 자라면 사실 꼭 스승을 찾을 것도 없다.
스스로 때가 되면 언제 어떻게든 법은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혜명은 이 한 마디에 몰록 깨달았다. 깨달음은 단순하다.
우리 중생들은 무엇이든 곧바로 분별한다.
좋거나 싫다고, 옳거나 그르다고, 선이나 악이라고, 크거나 작다고, 끊임없이 둘로 나누어 놓고 좋은 것은 집착하고 싫은 것은 거부한다.
선은 붙잡고 악은 버린다.
좋은 것이 붙잡아지지 않을 때도 괴롭고, 싫은 것을 버리고 싶은데 버리지 못할 때도 괴롭다.
이처럼 둘로 나누어 놓고 그 중 어느 한 쪽을 취사선택하게 되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중생들의 습관적인 분별이다. 분별의 끝에는 언제나 괴로움이 있다.
혜능은 법은 단순하다. 바로 이 분별을 순간 딱 멈추게 한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그 어떤 분별도 남아 있지 않을 때, 그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을 때, 그 어떤 것도 버리거나 취하려 하지 않을 때, 바로 그 때도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분별이 일어나는 자리, 분별이 사라지는 자리, 분별 그 자체는 무엇에 의지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가?
그렇다면 분별이 사라지고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래면목이다.
글쓴이:법상
혜능이 혜명에게 법을 설하는 내용에 주목해 보자.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그 때 어떤 것이 혜명 상좌의 본래면목인가?”
이 말 끝에 혜명은 언하대오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혜명은 이미 가슴 속에 자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발심이 익을 대로 익었고, 그 궁금증이 폭발 직전까지 와 있던 것이다.
오조스님 문하에서 충분히 공부가 되어 있었지만 시절인연과 기연(機緣)을 아직 맺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준비된 자라면 사실 꼭 스승을 찾을 것도 없다.
스스로 때가 되면 언제 어떻게든 법은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혜명은 이 한 마디에 몰록 깨달았다. 깨달음은 단순하다.
우리 중생들은 무엇이든 곧바로 분별한다.
좋거나 싫다고, 옳거나 그르다고, 선이나 악이라고, 크거나 작다고, 끊임없이 둘로 나누어 놓고 좋은 것은 집착하고 싫은 것은 거부한다.
선은 붙잡고 악은 버린다.
좋은 것이 붙잡아지지 않을 때도 괴롭고, 싫은 것을 버리고 싶은데 버리지 못할 때도 괴롭다.
이처럼 둘로 나누어 놓고 그 중 어느 한 쪽을 취사선택하게 되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중생들의 습관적인 분별이다. 분별의 끝에는 언제나 괴로움이 있다.
혜능은 법은 단순하다. 바로 이 분별을 순간 딱 멈추게 한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그 어떤 분별도 남아 있지 않을 때, 그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을 때, 그 어떤 것도 버리거나 취하려 하지 않을 때, 바로 그 때도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분별이 일어나는 자리, 분별이 사라지는 자리, 분별 그 자체는 무엇에 의지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가?
그렇다면 분별이 사라지고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래면목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