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방송 원고읽기] 초기불교와 선불교의 방편
2024-06-03
조회수 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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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is2024-06-03 22:53
선불교는 부처님의 수행법이 중국적 토양 아래에서 잘 정제되고 진화된 불교의 한 형태라고 생각되는데요
중국의 정신문화처럼 대범하고 호탕한 면이 있는 듯 합니다
말씀처럼 자잘한 것들은 대략 생략되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는 형태같아요
반면, 초기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와서 내 말이 맞는지 직접 경험하고 보라'는 부처님 말씀처럼
오온의 공함과 식의 무상함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잡고
부처님의 성정처럼 자상하고 세밀한 논리적 사유에 기초한
수행의 단계를 직접 체험하며 체득하도록 가르친 점에서 차이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의 뇌과학과 부처님의 초기불교가 굉장히 세밀하게 맞닿아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뇌의 전기적 작용이 식이며, 이 모든 것은 철저히 자기만의 세상이 펼쳐짐일 뿐이라는 것
이러한 인지는 진정한 실재를 반영하지 않으며 완전한 오류이고 착각이다라는 뇌과학의 최신논문을 보면
인간이 인지하는 색수상행식은 일체가 공하다라고 선언하신 부처님은 진정 뇌과학자가 맞는 것 같아요
선불교도 중요한 자산이지만 초기불교도 깊이 들여다 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 감사합니다🧡
중국의 정신문화처럼 대범하고 호탕한 면이 있는 듯 합니다
말씀처럼 자잘한 것들은 대략 생략되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는 형태같아요
반면, 초기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와서 내 말이 맞는지 직접 경험하고 보라'는 부처님 말씀처럼
오온의 공함과 식의 무상함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잡고
부처님의 성정처럼 자상하고 세밀한 논리적 사유에 기초한
수행의 단계를 직접 체험하며 체득하도록 가르친 점에서 차이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의 뇌과학과 부처님의 초기불교가 굉장히 세밀하게 맞닿아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뇌의 전기적 작용이 식이며, 이 모든 것은 철저히 자기만의 세상이 펼쳐짐일 뿐이라는 것
이러한 인지는 진정한 실재를 반영하지 않으며 완전한 오류이고 착각이다라는 뇌과학의 최신논문을 보면
인간이 인지하는 색수상행식은 일체가 공하다라고 선언하신 부처님은 진정 뇌과학자가 맞는 것 같아요
선불교도 중요한 자산이지만 초기불교도 깊이 들여다 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 감사합니다🧡
KK럭키2024-06-03 22:41
여러 방편을 통해 설해주시는 부처님 가르침에 수희찬탄합니다..
선지식의 바른 가르침 새겨 듣겠습니다.
부처님의 행이 곧 중도행이고 진리를 위한 솔선수범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지식의 바른 가르침 새겨 듣겠습니다.
부처님의 행이 곧 중도행이고 진리를 위한 솔선수범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불교가 선불교 전통이다 보니, 어떤 이들은 선불교를 초기불교와는 다른 생뚱맞은 불교이며, 불교의 본질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어서, 오늘은 선불교와 초기불교의 방편을 비교해 봄으로써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선불교는 지금 이대로 본래 부처라고 말한다. 본래 완전한 부처가 다만 분별망상이라는 분별식에 사로잡혀 본래의 부처를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분별식이 바로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오온, 십팔계의 식온이며, 육식이다.
이 식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중생심의 ‘마음’으로써 대상을 아는 마음, 알음알이, 분별심이라고도 부른다. 바로 이 식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좋거나 나쁘게 둘로 나눠 분별하도록 함으로써 좋은 것엔 집착하고 싫은 것은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기에 결국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바로 이 식을 타파하기 위한 방법으로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모토에서 보듯이, 식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채 곧바로 본래마음, 본성을 바로 가리켜 보임으로써 견성으로 이끈다. 즉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생각으로 헤아리고, 대상을 분별하는 알음알이라는 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식이 꼼짝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하고 꽉 막히도록 하는 방편으로 선문답이나 화두를 제시하여 직지인심하는 것이다.
그러면 초기불교를 보자. 초기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설법을 듣는 이들의 근기에 맞춰 대기설법을 하셨다. 부처님의 대기설법은 근기가 낮은 이로부터 높은 이에 이르는 단계적인 자비의 방편을 쓰셨다. 그것이 바로 시론, 계론, 생천론, 제욕의 과환, 출리의 공덕, 사성제다.
이 중에 처음의 시론, 계론, 생천론은 재가불자들을 위해 주로 설한 것으로, 쉽게 말해 시론은 보시를 실천함으로써 복을 쌓으라는 것이고, 계론은 계율을 잘 지키는 도덕적인 삶을 말하고, 생천론은 그러한 선업의 결과로 사후에는 하늘에 태어나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 뒤에 설한 것이 제욕의 과환인데, 이는 모든 감각적 욕망은 우리를 위험으로 이끈다는 것이고, 출리의 공덕은 삼계를 벗어나 열반을 구하는 공덕을 설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공부의 성숙을 이룬 제자들에게 결국 사성제를 가르치셨다.
사성제는 간략히 보면,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시켜 열반에 이르는 구조를 띠고 있다. 선불교에서처럼 괴로움의 원인만 소멸시키면 열반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괴로움의 원인은 12연기로 나타난다.
좀 쉽게 간략화해 보면 식, 명색, 육입 즉 십팔계가 공한 줄 모르기에 좋고 싫은 느낌이 일어나고 좋은 것은 집착하고 싫은 것은 거부하는 애와 취가 일어나 좋은 것을 취하려고 행위하고, 나쁜 것을 거부하려고 행위하기 때문에 그로인해 유, 생, 노사로 이어지는 괴로움이 연기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 또한 식이라는 분별심으로 인해 좋고 싫은 느낌이 생기고 그것은 곧 애욕과 집착을 가져오며, 집착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업을 짓게 됨을 설명한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분별식이 좋고 나쁨을 분별함으로써 본래 부처 즉 열반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초기경전에서는 12연기와 사성제로 구체화해 놓은 것이다.
초기불교든, 선불교든 중요한 점은 결국 이 모든 것이 다 견성, 열반에 이르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는 점이다. 결국 분별심이라는 식이 허망함을 깨달아, 식에서 이어지는 분별망상과 애욕,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 열반과 본래성품은 드러난다는 것이다.
초기불교는 이를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로 친절하게 구체화 시켜 놓은 것이고, 선불교는 그 모든 설명을 없애고 곧바로 바로 질러 가는 직지의 길로 드러냈을 뿐이다. 이처럼 선불교와 초기불교는 본질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은 길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