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난다의 보리수]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뭘까요? 서울대 못 가서 괴롭다? 이것은 서울대 가는 사람과 비교하니까 괴로운 거잖아요. 돈을 못 버니까 괴롭다? 돈을 많이 번 사람과 비교하니까 괴로운 것이고, 칭찬 듣는 사람과 비교하니까 칭찬 못 받은 내가 괴로운 것이고, 건강한 사람과 비교하니까 아픈 내가 괴로운 것이고요. 이 비교 분석하는 마음, 이 마음만 탁! 놓아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도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신심명(信心銘)에서도 그럽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단막증애 통연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
‘지극한 도는 어렵지가 않으니 다만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 싫어하거나 좋아하지만 않으면 통연명백하다. 막힘없이 분명하고 밝아진다.’이 소리입니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는 것만 가려서 분별하지만 않으면 통연명백해진다, 깨달음은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호리유차(豪釐有差)하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 털끝만큼이라도 차별이 있으면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진다. 둘로 나누기 시작하면,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너랑 나랑 분별하고 따지고 나누기 시작하면 그냥 중생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이 ‘나누는 것’만 없으면 바로 부처가 된다고 합니다.
머리를 가지고 비교 ․ 분석, 분별하고, 나누고, 판단하고 이걸 지금까지 해왔는데, 그것 때문에 괴로운 줄 모르고, 내 스스로 괴로운 일 힘들여서 분별하고, 힘들여서 상을 만들어 놓고, 힘들여서 그 상 속에 빠지고, 힘들여서 그 상을 깨야 되고, 이런 허망한,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져서 사는 이런 삶을 정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걸 깨는 것은 힘든 것이 아닙니다. 하던 것만 멈추면 되니까요. 뭔가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분별망상하고, 해석판단하던 것을 그저 하지 않으면 됩니다. 없던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저 하던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사실 쉬운 일입니다.
마조스님은 “도는 닦을 것이 없으니 다만 물들지만 말라.”고 했는데요, 아까 말한 이 상을 혼자서 만들어 놓는 것, 그게 물드는 겁니다.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빠져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 그게 물듦이지요. 마조는 말합니다.
“무엇이 물듬인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조작하여 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물듬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으로 이게 좋다 나쁘다 판단하고 분별하는 마음으로 뭔가 조작해서 하려고 하는 것, 더 잘해보려고 하고, 더 어떻게 해 보려고 하고, 이렇게 해보려고 하는 것 그게 물듬이라는 것이지요.
“도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가? 평상심이 바로 도다.” 평상심은 무엇인가? 인위적이고 조작이 없는 것입니다. 인위적으로 우리가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조작하는 것이 없고, 붙잡거나 버리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 둘로 나뉘는 것만 탁!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평상심이고 도입니다. 우리는 평상심을 쓰지 않고 온갖 망상을 부리면서 막 만드는 ‘조작’에 마음을 쓰고 살잖아요. 유위법을 쓰고 산단 말이에요. 유위심으로. 근데 평상심이라는 것은 무위법입니다. 아무것도 조작하지 않는 것, 지금까지 조작하면서 살던 마음을 탁! 그치는 것.
조주 스님이 남천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도입니까?” “평상심이 바로 도다.” “어떻게 닦아갈 수 있습니까?” “닦으려고 들면 벌써 어긋난다.” 닦으려고 들면 벌써 어긋납니다. 닦을 것 없이 원래부터 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닦을 것 없이 그저 지금 이렇게 본래부터 있던 바로 이것이 도이고, 이 평상심이 그대로 도입니다. 생사가 곧 열반인 것입니다.
글쓴이:법상
[아난다의 보리수]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뭘까요? 서울대 못 가서 괴롭다? 이것은 서울대 가는 사람과 비교하니까 괴로운 거잖아요. 돈을 못 버니까 괴롭다? 돈을 많이 번 사람과 비교하니까 괴로운 것이고, 칭찬 듣는 사람과 비교하니까 칭찬 못 받은 내가 괴로운 것이고, 건강한 사람과 비교하니까 아픈 내가 괴로운 것이고요. 이 비교 분석하는 마음, 이 마음만 탁! 놓아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도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신심명(信心銘)에서도 그럽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단막증애 통연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
‘지극한 도는 어렵지가 않으니 다만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 싫어하거나 좋아하지만 않으면 통연명백하다. 막힘없이 분명하고 밝아진다.’이 소리입니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는 것만 가려서 분별하지만 않으면 통연명백해진다, 깨달음은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호리유차(豪釐有差)하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 털끝만큼이라도 차별이 있으면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진다. 둘로 나누기 시작하면,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너랑 나랑 분별하고 따지고 나누기 시작하면 그냥 중생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이 ‘나누는 것’만 없으면 바로 부처가 된다고 합니다.
머리를 가지고 비교 ․ 분석, 분별하고, 나누고, 판단하고 이걸 지금까지 해왔는데, 그것 때문에 괴로운 줄 모르고, 내 스스로 괴로운 일 힘들여서 분별하고, 힘들여서 상을 만들어 놓고, 힘들여서 그 상 속에 빠지고, 힘들여서 그 상을 깨야 되고, 이런 허망한,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져서 사는 이런 삶을 정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걸 깨는 것은 힘든 것이 아닙니다. 하던 것만 멈추면 되니까요. 뭔가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분별망상하고, 해석판단하던 것을 그저 하지 않으면 됩니다. 없던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저 하던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사실 쉬운 일입니다.
마조스님은 “도는 닦을 것이 없으니 다만 물들지만 말라.”고 했는데요, 아까 말한 이 상을 혼자서 만들어 놓는 것, 그게 물드는 겁니다.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빠져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 그게 물듦이지요. 마조는 말합니다.
“무엇이 물듬인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조작하여 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물듬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으로 이게 좋다 나쁘다 판단하고 분별하는 마음으로 뭔가 조작해서 하려고 하는 것, 더 잘해보려고 하고, 더 어떻게 해 보려고 하고, 이렇게 해보려고 하는 것 그게 물듬이라는 것이지요.
“도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가? 평상심이 바로 도다.” 평상심은 무엇인가? 인위적이고 조작이 없는 것입니다. 인위적으로 우리가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조작하는 것이 없고, 붙잡거나 버리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 둘로 나뉘는 것만 탁!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평상심이고 도입니다. 우리는 평상심을 쓰지 않고 온갖 망상을 부리면서 막 만드는 ‘조작’에 마음을 쓰고 살잖아요. 유위법을 쓰고 산단 말이에요. 유위심으로. 근데 평상심이라는 것은 무위법입니다. 아무것도 조작하지 않는 것, 지금까지 조작하면서 살던 마음을 탁! 그치는 것.
조주 스님이 남천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도입니까?” “평상심이 바로 도다.” “어떻게 닦아갈 수 있습니까?” “닦으려고 들면 벌써 어긋난다.” 닦으려고 들면 벌써 어긋납니다. 닦을 것 없이 원래부터 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닦을 것 없이 그저 지금 이렇게 본래부터 있던 바로 이것이 도이고, 이 평상심이 그대로 도입니다. 생사가 곧 열반인 것입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