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교리] 십이처(十二處)
202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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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럭키2024-12-29 21:26
판단과 해석없이 그저 볼 뿐
판단과 해석하고 봐도 그저 볼 뿐
'그저 볼 뿐'
그런데 말입니다..
보고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요?
내가? 나는 무엇인가요?
나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요?
매 순간 변하는 몸뚱이?
매 순간 변하는 생각?
실체도 없는 이름과 모양?
도대체 나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인가요?
매 순간 변하는 몸뚱이와 생각에 나라는 이름과 모양을 붙인 것은 아닐까요?
'그저 모를 뿐'
선지식께 법문을 청할 뿐입니다.
바른 가르침 수희찬탄 합니다.
판단과 해석하고 봐도 그저 볼 뿐
'그저 볼 뿐'
그런데 말입니다..
보고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요?
내가? 나는 무엇인가요?
나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요?
매 순간 변하는 몸뚱이?
매 순간 변하는 생각?
실체도 없는 이름과 모양?
도대체 나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인가요?
매 순간 변하는 몸뚱이와 생각에 나라는 이름과 모양을 붙인 것은 아닐까요?
'그저 모를 뿐'
선지식께 법문을 청할 뿐입니다.
바른 가르침 수희찬탄 합니다.
세 번째는 12처에 대한 관찰로 이는 육근과 육경, 육내입처와 육외입처가 작용을 할 때 감각활동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뜻한다. 감각하는 기관과 기능, 활동 그리고 감각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대념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섯 내입처와 여섯 외입처의 법에서 법을 알아차린다. 어떻게 비구가 여섯 가지 안팎의 입처라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눈(眼)을 알아차리고, 형색(色)을 알아차리며,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고, 어떻게 사라지는지 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안다. 그는 귀(耳)를 알아차리고, 소리(聲)를 알아차리며... 내지... 그는 마음(意)을 알아차리고, 마음의 대상(法)을 알아차리며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어떻게 사라지는지 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안다”
예를 들어 보자. 눈(眼)으로 상대방이 나를 향해 손가락 욕(色) 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다. 이것이 곧 ‘눈(眼)을 알아차리고, 형색(色)을 알아차리며,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를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없던 화가 생겨나 나를 족쇄처럼 얽어맨다.
그러나 법념처로써 십이처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게 되면, 여기에 ‘나’라는 분별도 없고, ‘상대방’이라는 분별도 없고, ‘손가락 욕’이라는 분별도 없으며, 그저 눈앞에 어떤 움직임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릴 뿐이다. 그러나 조금 전에는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힘이 없었기에, 분별이 일어나 ‘저 사람이 나에게 손가락 욕을 했다’는 분별이 생겼고, 그로인해 화가 나는 족쇄에 얽혀들었음을 깨닫는다.
있는 그대로 통찰해 보니 그것은 다만 인연 따라 십이처가 화합한 것일 뿐이며, 무상하고, 실체가 없어 무아이기에, 화라는 고(苦)를 만들 아무런 이유도 되지 못함을 깨달아 족쇄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곧 ‘그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고, 어떻게 사라지는지 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안다.’의 뜻이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족쇄인 화, 탐욕, 집착, 어리석음 등의 괴로움들은 전부 이처럼 십이처가 화합한다는 인연 따라 저절로 일어날 뿐이다. 내가 있어서 진짜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그저 안팎의 입처라는 십이처가 만나면 누구라도 그 인연 따라 저절로 족쇄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곧 무아연기다.
이러한 족쇄를 만들어냄 없이, ‘내가 너를 본다’는 주객의 분별없이, 볼 때는 그저 ‘볼 뿐’이고, 들을 때는 그저 ‘들을 뿐’이 되면, 그것이 곧 안팎의 입처라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것이 곧 법념처로써 십이처를 관찰하는 수행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