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십이처를 ‘일체(一切)’라고 말씀하셨다. 『잡아함경』에서는 “일체는 십이처에 포섭되니,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뜻과 법이다.”라고 하였고, 『상윳따 니까야』에서는 일체를 설하신 후 “이러한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설한다면 그것은 말로만 떠벌리는 것일 뿐”이라고 설하셨다.
이 말은 곧 나의 다섯 가지 감각활동으로 감지되는 대상들, 나의 마음으로 지각되는 것들만을 ‘일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면 다섯 가지 감각활동[안이비설신]과 그 감각되는 대상[색성향미촉], 나의 의식[의]과 그 의식의 대상[법]만을 십이처로써 일체라고 한다.
내 눈앞에 보이는 대상, 내 귀로 듣는 소리, 코로 냄새 맡아지는 것, 혀로 맛보아지는 것, 몸으로 접촉되는 것, 의근으로 생각하는 것들 이외에 다른 것을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본다면, 지난 밤 뒷산 깊은 곳의 나무 한 그루가 거친 바람에 큰 굉음을 내며 쓰러졌지만 본 사람도 들은 사람도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그것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육내입처에서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갔을지라도 사람들마다 보는 것은 다 다르게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수많은 군중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이지만, 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매 순간 경험되어지는 것만을, 육입처로 인식되어지는 것만을 법[존재]이라고 정의한다. 물론 육내입처와 육외입처 자체도 실제로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허망하게 생겨난 것들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일체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있는 어떤 것을 이름 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허망하게 마음에서 연기하여 나타난 것을 일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일 뿐이다.
글쓴이:법상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십이처를 ‘일체(一切)’라고 말씀하셨다. 『잡아함경』에서는 “일체는 십이처에 포섭되니,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뜻과 법이다.”라고 하였고, 『상윳따 니까야』에서는 일체를 설하신 후 “이러한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설한다면 그것은 말로만 떠벌리는 것일 뿐”이라고 설하셨다.
이 말은 곧 나의 다섯 가지 감각활동으로 감지되는 대상들, 나의 마음으로 지각되는 것들만을 ‘일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면 다섯 가지 감각활동[안이비설신]과 그 감각되는 대상[색성향미촉], 나의 의식[의]과 그 의식의 대상[법]만을 십이처로써 일체라고 한다.
내 눈앞에 보이는 대상, 내 귀로 듣는 소리, 코로 냄새 맡아지는 것, 혀로 맛보아지는 것, 몸으로 접촉되는 것, 의근으로 생각하는 것들 이외에 다른 것을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본다면, 지난 밤 뒷산 깊은 곳의 나무 한 그루가 거친 바람에 큰 굉음을 내며 쓰러졌지만 본 사람도 들은 사람도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그것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육내입처에서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갔을지라도 사람들마다 보는 것은 다 다르게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수많은 군중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이지만, 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매 순간 경험되어지는 것만을, 육입처로 인식되어지는 것만을 법[존재]이라고 정의한다. 물론 육내입처와 육외입처 자체도 실제로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허망하게 생겨난 것들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일체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있는 어떤 것을 이름 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허망하게 마음에서 연기하여 나타난 것을 일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일 뿐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