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교리] 무명(無明)

202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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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이란 글자 그대로 ‘명(明)이 없다’는 말로, 그 의미는 각 경전마다의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 일반적으로 진리에 대한 무지를 말하며, 『잡아함경』과 『상윳따 니까야』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로 정의되고 있다.

진리에 대한 무지란 연기법에 대한 무지로써, 이 세상은 모두 연기되어진 존재이며, 그 모든 것들은 무상하고 무아이므로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인연 따라 연기적으로 만들어진 무상한 존재에 대해 실재한다고 여겨 집착하는 상태가 바로 무지요 무명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면 그것은 곧 괴로움이다. 실재하지 않음을 깨달으면 괴로움도 없다. 이것이 곧 사성제다. 사성제에 무지하면,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모르고, 괴로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며,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을 알지 못한다. 이처럼 십이연기의 무명은 곧 연기와 사성제, 무아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며, 내가 누구인지 조차 모르고 산다면 어떻게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처럼 삶에 대해, 우주에 대해, 나에 대해, 과거와 미래에 대해 모르고 살기 때문에 어리석은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명의 타파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무명을 타파하여 명[明:밝음=지혜]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핵심이다. 무명이 소멸될 때 결국 모든 괴로움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모르기 때문에 짓는 어리석은 행위인 업행(業行), 그것이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행(行)이다. 지혜로운 행위, 하되 함이 없는 행위가 무위행(無爲行)이라면, 어리석은 행위인 이 행(行)은 유위행(有爲行)이다. 하면서 스스로 한다는 유위의 행위이기에, 유위행은 유위업(有爲業)을 발생시키고, 그것은 업보(業報)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처럼 행은 모르기 때문에 짓는 업행이며, 선행도 악행도 근원에서는 모두가 유위행으로써 업을 늘리는 무지의 행이 아닐 수 없다.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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