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취온(五取蘊)이다. 색수상행식 오온이 쌓여 이루어진 인연가합의 존재를 우리는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무아(無我)를 실체적인 ‘자아’로 여기는 것이다. 오온이 나라면, 나의 괴로움은 곧 오온의 괴로움이다.
뒤에 사성제에서 공부하겠지만, 부처님께서 하신 모든 설법은 궁극적으로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것이다. 인간에게 고(苦)가 없다면,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오온의 가르침 또한 우리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해결에 도움을 주기 위해 생겨난 가르침이다. 괴로움을 소멸하려면 괴로움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오온은 말 그대로 ‘나’라는 존재의 다섯 가지의 쌓임이다. 그렇다면 ‘내가 괴롭다’고 할 때, 그 괴롭다는 것은 곧 오온 중에 어떤 요소가 괴롭다는 말이다. 즉, 우리가 괴로울 때는 다섯 가지 요소 중의 하나 때문에 괴롭다. 물론 두세 가지의 요소가 합쳐져서 괴로울 수도 있고, 다섯 가지 요소 모두가 총체적으로 다 괴로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괴로울 때 그 괴로움이 오온의 어떤 요소에서부터 비롯된 괴로움인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요소 가운데 어떤 요소 때문에 괴로운지를 알게 된다면, 그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색수상행식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저 막연하게 ‘괴롭다’라고 했던 것을, 오온의 가르침을 통해 다섯 가지로 해체해서 살펴보고, 그 각각이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사유하여 깨닫게 된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더욱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글쓴이:법상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취온(五取蘊)이다. 색수상행식 오온이 쌓여 이루어진 인연가합의 존재를 우리는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무아(無我)를 실체적인 ‘자아’로 여기는 것이다. 오온이 나라면, 나의 괴로움은 곧 오온의 괴로움이다.
뒤에 사성제에서 공부하겠지만, 부처님께서 하신 모든 설법은 궁극적으로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것이다. 인간에게 고(苦)가 없다면,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오온의 가르침 또한 우리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해결에 도움을 주기 위해 생겨난 가르침이다. 괴로움을 소멸하려면 괴로움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오온은 말 그대로 ‘나’라는 존재의 다섯 가지의 쌓임이다. 그렇다면 ‘내가 괴롭다’고 할 때, 그 괴롭다는 것은 곧 오온 중에 어떤 요소가 괴롭다는 말이다. 즉, 우리가 괴로울 때는 다섯 가지 요소 중의 하나 때문에 괴롭다. 물론 두세 가지의 요소가 합쳐져서 괴로울 수도 있고, 다섯 가지 요소 모두가 총체적으로 다 괴로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괴로울 때 그 괴로움이 오온의 어떤 요소에서부터 비롯된 괴로움인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요소 가운데 어떤 요소 때문에 괴로운지를 알게 된다면, 그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색수상행식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저 막연하게 ‘괴롭다’라고 했던 것을, 오온의 가르침을 통해 다섯 가지로 해체해서 살펴보고, 그 각각이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사유하여 깨닫게 된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더욱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