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주가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5)에게 물었다.
“무엇이 도입니까?”
“평상심이 바로 도다.”
“그것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까?”
“분별하면 곧 어긋난다.”
“분별하지 않고 어찌 도를 알 수 있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는 것에 있지 않다. 안다는 것은 허망한 착각이고, 모른다는 것은 무기(無記)이다. 만약 참으로 분별이 없는 도에 도달하면 마침내 큰 허공과 같아 말끔하게 공하거늘 어찌 옳다 그르다 할 수 있겠느냐?”
“제가 부처가 되려고 애쓸 때는 어떻습니까?”
“엄청 고생을 하게 되겠지.”
“부처가 되려고 애쓰고 노력하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부처가 이미 된 거야.”
✔ 평상심이 바로 도다. 우리가 모두 지니고 있는 바로 이 평범한 마음이 곧장 도다. 평상시의 마음이니 이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이는 없다.
그러니 어찌하여 이미 지니고 있는 평상심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겠는가? 평상심을 추구하여 얻을 수는 없다. 이미 구족되어 있기 때문이다.
추구하거나, 얻거나, 향해서 나아가려면 어떤 대상이 따로 있어야 한다. 둘로 분별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과 저것이 둘로 나누어져 있어야 이것에서 저것이 있는 쪽으로 나아가거나, 추구하거나, 얻을 수 있지 않은가?
더욱이 여기에서 저기로 가려면 애쓰고 노력을 해야 한다. 부처를 구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엄청난 고생이 동반된다. 부처는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갈 저기가 따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갈 곳을 정해 놓고 나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도전을 하고 있으니 고생을 할 수밖에.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을 때는 바로 부처다.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미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미 여기에 있다.
부처를 향해서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곧 분별일 뿐이다. 분별하면 곧장 어긋난다.
분별하지 않으면 어찌 도를 알 수 있느냐고? 반드시 분별하지 않아야만 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말도 방편일 뿐. 도를 알고자 한다면 어긋난다. 도는 알고 모르는 것에 있지 않다.
도를 알려고 하면 ‘아는 자’와 ‘아는 것’이 둘로 나누어져 있어야 한다. 그것은 분별이기에 어긋난 것이다.
참으로 분별없는 깨달음을 확인하면 말끔하게 텅 비어 공하니, 거기에는 옳다거나 그를 것이 없고, 알거나 모를 것도 없다. 그저 텅 비어 확연무성(廓然無聖)하여, 성스럽다고 이름 붙일 것조차 완전히 사라진다.
글쓴이:법상
조주가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5)에게 물었다.
“무엇이 도입니까?”
“평상심이 바로 도다.”
“그것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까?”
“분별하면 곧 어긋난다.”
“분별하지 않고 어찌 도를 알 수 있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는 것에 있지 않다. 안다는 것은 허망한 착각이고, 모른다는 것은 무기(無記)이다. 만약 참으로 분별이 없는 도에 도달하면 마침내 큰 허공과 같아 말끔하게 공하거늘 어찌 옳다 그르다 할 수 있겠느냐?”
“제가 부처가 되려고 애쓸 때는 어떻습니까?”
“엄청 고생을 하게 되겠지.”
“부처가 되려고 애쓰고 노력하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부처가 이미 된 거야.”
✔ 평상심이 바로 도다. 우리가 모두 지니고 있는 바로 이 평범한 마음이 곧장 도다. 평상시의 마음이니 이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이는 없다.
그러니 어찌하여 이미 지니고 있는 평상심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겠는가? 평상심을 추구하여 얻을 수는 없다. 이미 구족되어 있기 때문이다.
추구하거나, 얻거나, 향해서 나아가려면 어떤 대상이 따로 있어야 한다. 둘로 분별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과 저것이 둘로 나누어져 있어야 이것에서 저것이 있는 쪽으로 나아가거나, 추구하거나, 얻을 수 있지 않은가?
더욱이 여기에서 저기로 가려면 애쓰고 노력을 해야 한다. 부처를 구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엄청난 고생이 동반된다. 부처는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갈 저기가 따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갈 곳을 정해 놓고 나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도전을 하고 있으니 고생을 할 수밖에.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을 때는 바로 부처다.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미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미 여기에 있다.
부처를 향해서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곧 분별일 뿐이다. 분별하면 곧장 어긋난다.
분별하지 않으면 어찌 도를 알 수 있느냐고? 반드시 분별하지 않아야만 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말도 방편일 뿐. 도를 알고자 한다면 어긋난다. 도는 알고 모르는 것에 있지 않다.
도를 알려고 하면 ‘아는 자’와 ‘아는 것’이 둘로 나누어져 있어야 한다. 그것은 분별이기에 어긋난 것이다.
참으로 분별없는 깨달음을 확인하면 말끔하게 텅 비어 공하니, 거기에는 옳다거나 그를 것이 없고, 알거나 모를 것도 없다. 그저 텅 비어 확연무성(廓然無聖)하여, 성스럽다고 이름 붙일 것조차 완전히 사라진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