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경전] 불이법문(不二法門) - 유마경(維摩經)
2025-04-14
조회수 114
19
3
KK럭키2025-04-15 07:49
불립문자 언어도단
말로써 할 수 없지만 안 할 수도 없는. .
부처님의 방편과 자비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심전심,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지 말 자체는 방편일 뿐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선지식께 법문을 청할 뿐입니다.
말로써 할 수 없지만 안 할 수도 없는. .
부처님의 방편과 자비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심전심,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지 말 자체는 방편일 뿐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선지식께 법문을 청할 뿐입니다.
탈퇴한 회원2025-04-15 03:53
말없이 침묵하는 사람은 불이법을 아는 사람이었네요
매사에 끊고 맺음이 확실한 누군가는
불이법을 모르는 사람이었음을....
모를 뿐. 행할 뿐.
그저 침묵속에서 묵묵히 행할 뿐...
매사에 끊고 맺음이 확실한 누군가는
불이법을 모르는 사람이었음을....
모를 뿐. 행할 뿐.
그저 침묵속에서 묵묵히 행할 뿐...
iris2025-04-14 23:28
참된 불이법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그저 텅비어 고요할 뿐
문자도 언어도 없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불이에 드는 길이다.
감사합니다❤️
그저 텅비어 고요할 뿐
문자도 언어도 없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불이에 드는 길이다.
감사합니다❤️
유마가 여러 보살에게 물었다.
“보살이 어떻게 상대적 차별을 끊고 절대 평등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는지 설해 주십시오.”
법자재보살이 말했다.
“생겨나는 것(生)과 멸하는 것(滅)은 서로 둘로 대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본래 생한 것이 아니므로 멸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체득하는 것이 불이법문에 드는 것입니다.”
불사보살이 말했다.
"선(善)과 불선(不善)은 서로 대립합니다. 그러나 만약 선과 불선에 집착하지 않고 평등하며 진실한 공(空)의 도리를 깨닫는다면 바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것입니다."
보수보살은 말했다.
"자아(自我)와 무아(無我)는 서로 대립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적 자아도 알 수 없는데 어찌 무아(無我)가 인지될 수 있겠습니까? 자아의 본래 모습을 보는 사람은 이 두 가지 생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것입니다."
희견보살은 말했다.
"색(色)과 그 색이 공함(色空)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색 그대로가 공한 것으로써 색이 멸하여 공이 된 것이 아닙니다. 색의 본성이 공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의식(識)도 그대로가 공합니다. 식 그대로가 공한 것이지 식이 멸했기 때문에 공한 것은 아닙니다. 식의 본성이 그대로 공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체득하는 것이 불이법문에 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많은 보살들이 제각기 자신의 견해를 설했다. 유마힐이 문수보살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보살은 절대평등의 불이법문에 들 수 있습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했다.
"제가 생각하건대 모든 것에 있어서 말이 없고, 설함도 없으며, 가리키는 일도, 인지(認知)하는 일도 없으며 모든 질문과 대답을 떠나는 것이 절대 평등한 경지에 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여러 보살들이 자기의 견해를 말했습니다. 거사께서 말씀해주실 차례입니다. 어떻게 하면 보살은 절대 평등한 경지에 드는 것입니까?"
그러나 유마힐은 오직 묵연(默然)하여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문수사리는 감탄하여 말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문자도 언어도 없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불이법문에 드는 길입니다."
이와 같이 절대평등의 불이법문에 드는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 이곳에 모인 5천의 보살이 모두 불이법문에 들었으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 참된 불이법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말로 표현되는 순간 그것은 둘로 셋으로 쪼개어지고, 개념화되기 때문이다. 둘이 아닐 때는 그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고, 붙을 것이 없다. 그저 텅 비어 고요할 뿐.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고 말하더라도 이미 거기에는 생사와 열반을 전제로 그것이 없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니 벌써 그 말은 둘로 나뉘어져 있다.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야’라는 말 안에 이미 생사가 있고 열반이 있다. 참으로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님을 설하려면 ‘생사’라는 말, ‘열반’이란 말조차 붙을 자리가 없어야 한다. 그저 침묵할 뿐. 개념 지어 말로써 설명하게 되면 이미 둘로 나뉘는 것이다.
문자도 언어도 없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불이에 드는 길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