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간의 잡다한 일들이 있을 때는 그것을 배척하지 말고 다만 생각이 올라오는 곳에서 가볍게 화두를 들어 굴려보십시오. 그러면 크게 힘을 덜 것이고 또한 무한한 힘을 얻을 것입니다. 이처럼 공(公)께서는 화두를 들고 버티시되,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지는 마십시오. 문득 저절로 깨닫는 때가 올 것입니다.
공부란 세간의 수많은 일들을 사량분별하는 마음을 ‘마른 똥막대기’라는 화두 위에 돌려놓고 분별의식이 움직이지 않게 하기를, 마치 흙이나 나무인형과 같이 해야 합니다. 깜깜하여 아무 것도 잡을 것이 없음을 느낄 때가 좋은 소식입니다.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고,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며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까 하고 분별하지 마십시오.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곧 삿된 길에 떨어집니다.
‘마른 똥막대기’ 화두는 어떠합니까? 화두를 붙잡을 곳도 없고, 재미도 없고, 갑갑하다고 느낄 때가 도리어 좋은 소식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화두를 드는 곳에서 받아들이거나 긍정해도 안 되고, 일 없는 가운데 드러내어도 안 되고, 화두를 들 때는 있다가 들지 않을 때는 없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화두를 들 때에는 여러 가지 솜씨와 기량을 발휘할 필요가 없으니,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언제나 끊어짐이 없게 하고, 희로애락(喜怒哀樂) 속에서 화두를 분별하지 마십시오. 화두를 들고 또 들며, 화두를 보고 또 봄에 이치의 길이 끊어지고, 재미도 없고, 마음이 답답함을 느낄 때가 바로 당신이 신명(身命)을 버릴 곳입니다. 반드시 기억하고 기억할 것은, 이와 같은 경계를 보고 물러서서는 안 되니, 이와 같은 경계가 바로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는 소식입니다.
하루하루 행주좌와 하는 가운데 차별 경계를 겪으며 힘이 덜어짐을 느낄 때가 바로 힘을 얻는 곳이니, 힘을 얻는 곳에서 도리어 힘을 덜게 됩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힘을 써서 지탱하려 한다면 그것은 결정코 사법(邪法)이지 불법은 아닙니다. 길고 멀리 보는 마음으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와 맞붙어 버티고 또 버티다가 마음이 어떻게도 할 수가 없어지면 홀연히 꿈에서 깨어난 듯 하고, 연꽃이 피고, 구름을 헤치고 해가 나온 듯할 것입니다. 이때에 다다르면 저절로 한 덩어리가 됩니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쓰러지듯 번뇌망상이 올라오더라도 ‘무자(無字)’화두만 지켜보되,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는, 또 철저하고 철저하지 못하고는 상관치 마십시오.
✔ 대혜종고 스님은 흔히 간화선(看話禪)의 창시자라고 알려져 있다. 스님 이전까지 특별한 선 수행 방식 없이 스승과 제자 간의 법문과 문답 등을 통해 언하대오로 이어져 내려오던 조사선의 일반적인 선의 풍토에 ‘간화선(看話禪)’이라는 하나의 수행법을 구조화시켜 정착시킨 것이다.
글쓴이:법상
세간의 잡다한 일들이 있을 때는 그것을 배척하지 말고 다만 생각이 올라오는 곳에서 가볍게 화두를 들어 굴려보십시오. 그러면 크게 힘을 덜 것이고 또한 무한한 힘을 얻을 것입니다. 이처럼 공(公)께서는 화두를 들고 버티시되,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지는 마십시오. 문득 저절로 깨닫는 때가 올 것입니다.
공부란 세간의 수많은 일들을 사량분별하는 마음을 ‘마른 똥막대기’라는 화두 위에 돌려놓고 분별의식이 움직이지 않게 하기를, 마치 흙이나 나무인형과 같이 해야 합니다. 깜깜하여 아무 것도 잡을 것이 없음을 느낄 때가 좋은 소식입니다.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고,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며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까 하고 분별하지 마십시오.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곧 삿된 길에 떨어집니다.
‘마른 똥막대기’ 화두는 어떠합니까? 화두를 붙잡을 곳도 없고, 재미도 없고, 갑갑하다고 느낄 때가 도리어 좋은 소식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화두를 드는 곳에서 받아들이거나 긍정해도 안 되고, 일 없는 가운데 드러내어도 안 되고, 화두를 들 때는 있다가 들지 않을 때는 없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화두를 들 때에는 여러 가지 솜씨와 기량을 발휘할 필요가 없으니,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언제나 끊어짐이 없게 하고, 희로애락(喜怒哀樂) 속에서 화두를 분별하지 마십시오. 화두를 들고 또 들며, 화두를 보고 또 봄에 이치의 길이 끊어지고, 재미도 없고, 마음이 답답함을 느낄 때가 바로 당신이 신명(身命)을 버릴 곳입니다. 반드시 기억하고 기억할 것은, 이와 같은 경계를 보고 물러서서는 안 되니, 이와 같은 경계가 바로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는 소식입니다.
하루하루 행주좌와 하는 가운데 차별 경계를 겪으며 힘이 덜어짐을 느낄 때가 바로 힘을 얻는 곳이니, 힘을 얻는 곳에서 도리어 힘을 덜게 됩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힘을 써서 지탱하려 한다면 그것은 결정코 사법(邪法)이지 불법은 아닙니다. 길고 멀리 보는 마음으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와 맞붙어 버티고 또 버티다가 마음이 어떻게도 할 수가 없어지면 홀연히 꿈에서 깨어난 듯 하고, 연꽃이 피고, 구름을 헤치고 해가 나온 듯할 것입니다. 이때에 다다르면 저절로 한 덩어리가 됩니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쓰러지듯 번뇌망상이 올라오더라도 ‘무자(無字)’화두만 지켜보되,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는, 또 철저하고 철저하지 못하고는 상관치 마십시오.
✔ 대혜종고 스님은 흔히 간화선(看話禪)의 창시자라고 알려져 있다. 스님 이전까지 특별한 선 수행 방식 없이 스승과 제자 간의 법문과 문답 등을 통해 언하대오로 이어져 내려오던 조사선의 일반적인 선의 풍토에 ‘간화선(看話禪)’이라는 하나의 수행법을 구조화시켜 정착시킨 것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