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수심결』을 보자.
“그대의 몸 가운데 있는데도 그대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다. 그대가 하루의 모든 시간 가운데 배고픈 줄 알고 목마른 줄 알며, 춥고 더운 것을 알고, 혹은 화를 내거나 기뻐하기도 하는 이것이 도대체 어떤 물건인가?
이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 인연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어서, 그 성질이 무디고 둔해 아무 감정이 없는데, 어찌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 있겠는가?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은 필시 그대의 불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임제의현(臨濟義玄, ?∼867) 스님은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이 몸은 법을 설할 줄도 법을 들을 줄도 모른다. 허공도 법을 설하거나 들을 줄 모르고, 오로지 그대 눈앞[目前]에 역력히 홀로 밝은[歷歷孤明], 아무 형상 없는 이것이 법을 설할 줄도 알고, 법을 들을 줄도 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 없는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이며, 또한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그러므로 불성이란 곧 그대의 몸에 있는데 어찌 허망하게 밖에서 구하고자 하는가? 그래도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면, 간략하게 옛 성인들이 도를 깨달은 인연[入道因緣]을 밝혀 그대의 의심을 풀어주고자 하니 그대는 잘 듣고 믿도록 하라.”
하루의 모든 시간 가운데 우리가 배고프면 배고픈 줄 아는 ‘이것’, 목마르면 목마른 줄 아는 ‘이것’,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아는 ‘이것’, 화를 내면 화를 내는 줄 알고 기쁘면 기쁜 줄 아는 ‘이것’이 도대체 무슨 물건인가?
우리의 이 몸, 육신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대지의 사대(四大)가 모여서 임시로 이루어진 인연생의 허망한 인연가합의 존재일 뿐이다. 대지의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인연 따라 화합함으로써 지대(地大)는 우리 몸의 뼈와 살과 근육을 이루고, 수대(水大)는 우리 몸의 혈액과 눈물, 콧물, 침과 땀, 소변 등을 이루며, 화대(火大)는 몸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 주고, 풍대(風大)는 호흡, 움직임 등에 관여하면서 나를 형성한다. 이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몸은 다만 인연이 화합된 인연가합의 거짓되고 임시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 감정도 없고, 생각도 없고, 그 성질이 무디고 둔하다.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몸은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가 없다. 즉 이 몸 자체는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 못한다. 만약에 이 몸 자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할 줄 안다면, 지금 막 죽은 시체도 그것을 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깊은 잠에 빠졌거나 실신했을 때도 몸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이 몸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대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가? 바로 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불성이며, 본래면목이다.
우리는 몸에 있는 눈이 본다고 여기지만, 정말 그럴까? 만약에 눈이 보는 것이라면 눈을 뜨고 있으면 항상 보여야 한다. 그러나 눈을 멀쩡히 뜨고 있더라도 전혀 다른 생각 속에 깊이 빠져 있으면 눈앞의 대상을 보지 못한다. 매일 집과 회사를 오고 가며 보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자기의 관심사가 있는 것들만 유심히 바라볼 뿐 다른 것은 전혀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함께 여행을 가더라도 자기의 업에 따라 보는 것이 제각기 다르다. 대학 캠퍼스에 많은 사람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다른 사람은 마치 아웃포커스 되듯 의식 뒤로 사라져 버린다.
또 귀가 듣는 것이라면, 귀는 항상 열려 있으니 어떤 소리든 다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귀가 멀쩡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름철 매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고 못 듣는 사람도 있다. 다른 생각에 깊이 빠져 있을 때는 옆에서 나를 불러도 잘 듣지 못한다. 잠을 잘 때도 귀가 열려 있지만 못 듣는다. 왜 그럴까? 귀가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보고 듣는가? 『수심결』의 가르침처럼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은 필시 그대의 불성’인 것이다. 임제 스님은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은 법을 설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른다. 오로지 그대 눈앞에 역력히 홀로 밝은, 아무 형상 없는 이것이 법을 설할 줄도 알고, 법을 들을 줄도 안다”라고 했다. ‘그대의 눈앞에 역력히 홀로 밝은, 아무 형상 없는 이것’이 바로 불성이요, 본래면목이며, 자성이다. ‘형상 없는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법인이며,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형상 없는 이것’이 지금 들려오는 매미 소리를 듣게 하고, 컴퓨터 자판 위로 손가락을 움직여 글을 치게 하고, 모니터를 보게 한다. 글을 쓰는 와중에도 알아서 저절로 숨을 쉬게 하고, 조금 전에 먹었던 음식을 소화시키고, 세포를 분열시키고, 나이를 먹게 하고, 몸에 노화를 촉진시킨다.
눈이 눈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이것’은 눈으로 보거나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보는 것을 통해, 듣는 것을 통해, 매 순간 ‘이것’이 확인된다. 이처럼 ‘이것’은 즉해 있다. 불이법이다. 나와 둘이 아니다. ‘여기’에 있거나 ‘저기’에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임제 스님은 이것을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하여 ‘위치 없는 참사람’이라고 했다.
‘이것’, 참다운 나의 본래면목은 어디에 있나? 여기 혹은 저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몸속에 있거나 몸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소리가 들릴 때 ‘이것’은 바깥의 소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몸의 귀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종소리가 ‘땡’ 하는 여기에 즉해 있다. 죽비소리가 바로 ‘이것’이고, 까마귀가 깍깍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진실은 ‘내가 죽비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 주객(主客)이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탁탁!’ 이것뿐이다. 이것이 곧 불이법이며,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도리다.
그래서 텅 비어 있다는 표현으로 공적(空寂)하여 비어 있고, 고요하다고 설명한다. 애써 설명해 본다면,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고 우주 허공에도 늘 편재해 있다. 온 우주 전체가 ‘이것’ 하나뿐이다. ‘이것’ 하나에서 온 우주가 생멸법으로 나왔다. ‘이것’ 위에서 인연생 인연멸로서 연기하는 일체 모든 삼라만상이 드러나고 사라질 뿐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 마음에서 모든 것이 나왔다. 그러니 어찌 ‘이것’을 허망하게 바깥에서 구하고자 하는가?
어떤가? 알겠는가? 당신의 진정한 생명인, 진정한 본성인, 진정한 나 자신인 ‘이것’이 무엇인지 확인이 되는가?
글쓴이:법상
다시 『수심결』을 보자.
“그대의 몸 가운데 있는데도 그대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다. 그대가 하루의 모든 시간 가운데 배고픈 줄 알고 목마른 줄 알며, 춥고 더운 것을 알고, 혹은 화를 내거나 기뻐하기도 하는 이것이 도대체 어떤 물건인가?
이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 인연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어서, 그 성질이 무디고 둔해 아무 감정이 없는데, 어찌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 있겠는가?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은 필시 그대의 불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임제의현(臨濟義玄, ?∼867) 스님은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이 몸은 법을 설할 줄도 법을 들을 줄도 모른다. 허공도 법을 설하거나 들을 줄 모르고, 오로지 그대 눈앞[目前]에 역력히 홀로 밝은[歷歷孤明], 아무 형상 없는 이것이 법을 설할 줄도 알고, 법을 들을 줄도 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 없는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이며, 또한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그러므로 불성이란 곧 그대의 몸에 있는데 어찌 허망하게 밖에서 구하고자 하는가? 그래도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면, 간략하게 옛 성인들이 도를 깨달은 인연[入道因緣]을 밝혀 그대의 의심을 풀어주고자 하니 그대는 잘 듣고 믿도록 하라.”
하루의 모든 시간 가운데 우리가 배고프면 배고픈 줄 아는 ‘이것’, 목마르면 목마른 줄 아는 ‘이것’,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아는 ‘이것’, 화를 내면 화를 내는 줄 알고 기쁘면 기쁜 줄 아는 ‘이것’이 도대체 무슨 물건인가?
우리의 이 몸, 육신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대지의 사대(四大)가 모여서 임시로 이루어진 인연생의 허망한 인연가합의 존재일 뿐이다. 대지의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인연 따라 화합함으로써 지대(地大)는 우리 몸의 뼈와 살과 근육을 이루고, 수대(水大)는 우리 몸의 혈액과 눈물, 콧물, 침과 땀, 소변 등을 이루며, 화대(火大)는 몸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 주고, 풍대(風大)는 호흡, 움직임 등에 관여하면서 나를 형성한다. 이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몸은 다만 인연이 화합된 인연가합의 거짓되고 임시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 감정도 없고, 생각도 없고, 그 성질이 무디고 둔하다.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몸은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가 없다. 즉 이 몸 자체는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 못한다. 만약에 이 몸 자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할 줄 안다면, 지금 막 죽은 시체도 그것을 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깊은 잠에 빠졌거나 실신했을 때도 몸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이 몸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대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가? 바로 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불성이며, 본래면목이다.
우리는 몸에 있는 눈이 본다고 여기지만, 정말 그럴까? 만약에 눈이 보는 것이라면 눈을 뜨고 있으면 항상 보여야 한다. 그러나 눈을 멀쩡히 뜨고 있더라도 전혀 다른 생각 속에 깊이 빠져 있으면 눈앞의 대상을 보지 못한다. 매일 집과 회사를 오고 가며 보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자기의 관심사가 있는 것들만 유심히 바라볼 뿐 다른 것은 전혀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함께 여행을 가더라도 자기의 업에 따라 보는 것이 제각기 다르다. 대학 캠퍼스에 많은 사람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다른 사람은 마치 아웃포커스 되듯 의식 뒤로 사라져 버린다.
또 귀가 듣는 것이라면, 귀는 항상 열려 있으니 어떤 소리든 다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귀가 멀쩡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름철 매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고 못 듣는 사람도 있다. 다른 생각에 깊이 빠져 있을 때는 옆에서 나를 불러도 잘 듣지 못한다. 잠을 잘 때도 귀가 열려 있지만 못 듣는다. 왜 그럴까? 귀가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보고 듣는가? 『수심결』의 가르침처럼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은 필시 그대의 불성’인 것이다. 임제 스님은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은 법을 설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른다. 오로지 그대 눈앞에 역력히 홀로 밝은, 아무 형상 없는 이것이 법을 설할 줄도 알고, 법을 들을 줄도 안다”라고 했다. ‘그대의 눈앞에 역력히 홀로 밝은, 아무 형상 없는 이것’이 바로 불성이요, 본래면목이며, 자성이다. ‘형상 없는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법인이며,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형상 없는 이것’이 지금 들려오는 매미 소리를 듣게 하고, 컴퓨터 자판 위로 손가락을 움직여 글을 치게 하고, 모니터를 보게 한다. 글을 쓰는 와중에도 알아서 저절로 숨을 쉬게 하고, 조금 전에 먹었던 음식을 소화시키고, 세포를 분열시키고, 나이를 먹게 하고, 몸에 노화를 촉진시킨다.
눈이 눈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이것’은 눈으로 보거나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보는 것을 통해, 듣는 것을 통해, 매 순간 ‘이것’이 확인된다. 이처럼 ‘이것’은 즉해 있다. 불이법이다. 나와 둘이 아니다. ‘여기’에 있거나 ‘저기’에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임제 스님은 이것을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하여 ‘위치 없는 참사람’이라고 했다.
‘이것’, 참다운 나의 본래면목은 어디에 있나? 여기 혹은 저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몸속에 있거나 몸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소리가 들릴 때 ‘이것’은 바깥의 소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몸의 귀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종소리가 ‘땡’ 하는 여기에 즉해 있다. 죽비소리가 바로 ‘이것’이고, 까마귀가 깍깍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진실은 ‘내가 죽비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 주객(主客)이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탁탁!’ 이것뿐이다. 이것이 곧 불이법이며,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도리다.
그래서 텅 비어 있다는 표현으로 공적(空寂)하여 비어 있고, 고요하다고 설명한다. 애써 설명해 본다면,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고 우주 허공에도 늘 편재해 있다. 온 우주 전체가 ‘이것’ 하나뿐이다. ‘이것’ 하나에서 온 우주가 생멸법으로 나왔다. ‘이것’ 위에서 인연생 인연멸로서 연기하는 일체 모든 삼라만상이 드러나고 사라질 뿐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 마음에서 모든 것이 나왔다. 그러니 어찌 ‘이것’을 허망하게 바깥에서 구하고자 하는가?
어떤가? 알겠는가? 당신의 진정한 생명인, 진정한 본성인, 진정한 나 자신인 ‘이것’이 무엇인지 확인이 되는가?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