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 불성은 작용하는 데 있다(1)

202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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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이견왕(異見王)이 바라제(婆羅提) 존자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존자가 대답했다.

“불성을 보는 것[見性]이 곧 부처입니다.”

왕이 물었다.

“스님은 불성을 보았습니까?”

존자가 말했다.

“나는 불성(佛性)을 보았습니다.”

왕이 물었다.

“불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존자가 말했다.

“불성은 작용하는 데 있습니다.”

왕이 물었다.

“그것은 어떤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존자가 말했다.

“지금도 작용이 드러나고 있지만, 왕께서 스스로 보지 못할 뿐입니다.”

왕이 물었다.

“그것이 나에게도 있다고요?”

존자가 말했다.

“만약 왕께서 작용하고 있다면 불성 아닌 것이 없지만, 왕께서 작용하지 않는다면 몸조차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왕이 물었다.

“만약 작용할 때는 몇 곳에서 나타납니까?”

존자가 말했다.

“나타날 때는 여덟 곳으로 나타납니다.”

왕이 말했다.

“그 나타나는 여덟 곳이 어디인지를 나를 위해 설명해 주십시오.”

존자가 말했다.

“태(胎) 안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라 하며, 눈에 있으면 보고, 귀에 있으면 듣고,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고, 혀에 있을 때는 말을 하고, 손에 있으면 붙잡으며, 발에 있으면 움직여 걷습니다. 두루 나타나면 온 세계를 다 감싸지만 거두어들이면 하나의 티끌 속에 있습니다. 아는 자는 이것이 곧 불성인 줄 알지만 모르는 자들은 정혼(情魂)이라 부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바로 열려 깨달았다.

 

昔異見王 問婆羅提尊者 王曰 何者是佛 尊者曰 見性是佛 王曰 師見性否 尊者曰 我見佛性 王曰性 在何處 尊者曰 性在作用 王曰是何作用 我今不見 尊者曰 今現作用 王自不見 王曰於我有否 尊者曰 王若作用 無有不是 王若不用 體亦難見 王曰若當用時 幾處出現 尊者曰 若出現時 當有其八 王曰其八出現 當爲我說 尊者曰 在胎曰身 處世曰人 在眼曰見 在耳曰聞 在鼻辨香 在舌談論 在手執捉 在足運奔 現俱該沙界 收攝在一微塵 識者知是佛性 不識者喚作精魂 王聞心卽開悟



무엇이 부처인가? 무엇이 진리인가? 불성을 보는 것, 자기 성품을 보는 것이 곧 부처다. 즉 견성(見性)이 곧 부처다. 그렇다면 그 불성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바라제 존자는 “불성은 작용하는 데 있다”라고 답한다. 왕은 기가 찰 노릇이다. ‘도대체 그것은 어떤 작용이기에 존자님은 보고, 나는 보지 못하는 것일까?’ 존자의 답처럼, 사실은 지금 이렇게 묻는 것을 통해 이미 작용은 드러나 있다. 왕이 무엇이든 작용할 때 곧바로 불성이 확인된다.

우리는 매 순간 이렇게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하며, 손을 움직이고 발로 걷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 모든 작용을 통해 불성은 매 순간 드러나고 있다. 이 매 순간의 작용을 통해 이렇게 살아 있지 않은가?

만약 작용하지 않는다면 불성은커녕 이 몸조차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 몸을 보는 것이 바로 작용함인데, 작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몸을 볼 수 있겠는가? 이 몸을 본다고 할 때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이 몸을 보는가? 눈이 보는 것이 아니다. 눈이 있어도 못 보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다른 것에 깊이 빠져 있을 때는 두 눈을 버젓이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한다. 눈알이 볼까? 그렇다면 눈알을 빼놓고 보라고 하면 볼 수 있어야 한다. 시신경이 볼까? 마찬가지다. 뇌가 본다고? 그것도 아니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본다.

이 단순한 사유, 회광반조(廻光返照)를 우리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도대체 무엇이 보는가? 방편으로 말해 본다면, ‘보는 놈’ 이것이 불성이다. 그렇다고 보는 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견(見)이 곧 성(性)이다”라고도 한다. ‘보는 것’이 바로 성품이며 불성이다. ‘보는 작용’을 통해 불성, 성품, ‘이것’을 확인한다.

‘이것’은 보는 작용을 통해 확인되지만, ‘이것’은 물건이 아니다. 크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직접 볼 수는 없다. 눈이 눈을 볼 수 없지만, 다른 것을 봄을 통해 여기에 눈이 있음이 확인되는 것과 같다. 본다는 작용을 통해 ‘보는 놈’이라는 불성이 확인된다. 그러니 작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살아 있다고 할 것인가? 이 작용을 통해 보고 듣고 냄새도 맡는다. 말도 하고, 손으로 붙잡기도 하고, 발로 움직여 걷기도 하는 등 ‘살아 있음’, ‘나 있음’, ‘I AM’이 확인된다.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지 않은가? 저절로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가? ‘이것’이 당신의 진정한 살림살이다. 본래면목이요 불성이다.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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