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돈오 이후의 점수에 대해서 지눌 스님은 다시 이렇게 설한다.
“점수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 온 습기(習氣)는 갑자기 제거하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해 수행하고 점점 익혀서 공(功)을 이루고, 또 오랫동안 성인의 자질을 잘 길러나가야 성인이 되는 것이므로 점수라 한 것이다. 비유하면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이 갖추어져 있음은 어른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은 충분하지 못하므로 많은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과 같다.”
비록 본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 온 습기는 갑자기 제거하기 어렵다. 그래서 돈오의 깨달음에 의지해 수행하고 점점 익혀서 깨달음이 확고하게 자리 잡도록 하고, 이를 통해 자유자재한 깨달음의 삶이 구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점수(漸修)이다. 오랜 시간 보임을 통해 성인의 자질을 길러나가야 하므로 점수라고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점수는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이 갖추어져 있지만, 아직 어른이 되기에 충분하지 못한 것과 같다. 적어도 20~30년은 지나야 어른으로서 제 할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 점수의 수행도 아기가 성인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점수의 수행에 있어서 너무 보채거나 억지로 빨리 끝내려고 유위조작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점수의 수행을 할 때는 억지로 열심히 하려고 애쓰기보다 자연스럽게 놀이하듯 힘을 빼고 삶의 흐름을 타야 한다.
주어진 삶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허용함으로써 삶과 싸우지 않게 된다. 우리는 내 뜻대로 안 될 때 괴롭고, 내 뜻대로 되면 행복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런 ‘내 뜻’을 따로 내세워 집착하지 않게 되면, 주장하고 집착할 ‘내 뜻’이 없어서 언제나 자연스럽게 흐를 뿐이다. 이렇게 되어도 좋고, 저렇게 되어도 좋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없이 산다는 것은 아니다. 자기 뜻도 있고, 판단도 있고, 분별도 한다. 오히려 중생보다 더욱 효율적으로 분별하고, 더욱 직관적으로 판단한다. 판단에 주저함이 없고, 많은 생각으로 인해 깊은 고뇌에 빠지지 않는다. 삶이 가볍게 흘러간다. 주장할 ‘내 뜻’이 없으니, 내 뜻과 맞지 않는 사람과 다툴 일도 사라진다. 물론 때로는 업습에 끌려서 자기 생각을 주장하기도 하겠지만, 오뚝이가 금방 다시 자리를 잡듯이 법의 힘으로 다시금 법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이처럼 돈오한 자는 돌아올 법의 자리가 확고해진다. 예전에는 뭐가 뭔지도 몰랐다. 삶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것인지도 모른 채 생각과 분별에 끌려다니며 이리저리 휘둘리고 살았다. 이제는 나와 삶의 진실에 눈을 떴기 때문에 물결처럼 휘둘리지 않는다. 잠시 생각과 분별에 끌려갔을지라도 ‘돌아올 법의 자리’가 확보되었기 때문에 마음에 굳건한 중심이 생겨난 것이다. 잠깐 휘둘렸다가도 다시 돌아올 힘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점수의 수행 아닌 수행이다. 이것은 수행이라고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러운 내맡김의 과정이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허용하는 대수용의 공부다. 법신불을 자수용신(自受用身)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일체경계를 분별하거나 취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제는 ‘나’가 따로 있고, ‘세상’이 따로 있어서 내가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이고 세상이 나이다. 내가 경계이고 경계가 나이다. 내가 바로 너이고, 네가 바로 나이다. 둘이 아닌 하나의 자성 자리가 확고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경계나 상황이 오면, 그 상황을 ‘내가’ 통제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상황을 주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상황 자체가 이미 진실임을 안다. 주어진 삶 자체가 진리임을 안다.
삶 전체가 불이법으로써 통으로, 전체성으로 하나의 부처이다. 온 우주와 삶 전체가 그대로 법신불이다. 그리고 삶의 내용물은 중중무진의 인과 연이 화합하여 연기법으로써 운행된다. 이것이 곧 불(佛)이고 법(法)이다. 삶은 이처럼 불법에 따라 흐른다. 거기에 ‘나’는 없다. 내 뜻대로 운행되는 것이 아니라 연기법에 따라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이와 같은 불법에 통달한 사람이라면, ‘내 뜻’대로 삶을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삶은 내 뜻대로 통제되는 곳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러니 ‘내 뜻대로’ 살려고 하던 삶에서, ‘부처님 뜻대로’, ‘인연따라’, ‘불법에 내맡기며’ 살아가는 삶으로 전환된다. 삶을 주도해 오던 ‘나’가 빠지는 것이다.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다. 추구하는 것도 없다. 할 것이 없지만, 하지 못할 것도 없다. 하되 함이 없이 무엇이든 다 한다. 이것이 와도 좋고 저것이 와도 좋다.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거나, ‘결코’ 저렇게 되면 안 될 것이 없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알아서 아는 것이 아니다. 오직 모를 뿐이다. 모르지만,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고 분별없이 삶에 내맡긴다. 안다는 것은 중중무진의 연기법을 자기 생각으로 헤아린다는 뜻인데, 어떻게 그 다함 없는 연기를 다 알 수 있겠는가?
내 쪽에서 통제하지 않고 ‘불법’이 완벽하게 저절로 통제되고 있음을 믿는다. 이런 것이 참된 믿음이다. 내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불법을 믿는 것이다. 삶을 통째로 믿는 것이다. ‘나는 진급해야 해’,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붙어야 해’, ‘돈을 얼마만큼 벌어야 해’ 등의 내 생각을 믿지 않고,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런 생각, 분별이 없는 삶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서도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나 집착이 없다. 삶이 본래 완전하게 흐름을 굳게 믿는다. 내가 삶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삶이기에, 삶의 흐름에 든다.
그렇다고 열정도 없고, 열심히 살지도 않으며 게을러지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이 중중무진 연기법의 중요한 일부임을 알기에,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일한다. 다만 결과는 내 뜻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알기에 내맡긴다. 이런 삶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얼마나 걸림 없을까?
삶은 본래 그대로 완전하기에, 완전한 삶에 그저 내맡기는 것이다.
이를 『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했다. 일체 모든 것이 그대로 참된 실상이라는 것이다. 임제 스님은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 하여 ‘서 있는 그 자리가 참된 진실의 자리’라 했고, 승조(僧肇)는 촉사이진(觸事而眞), 석두(石頭)는 촉목회도(觸目會道), 도오(道吾)는 촉목보리(觸目菩提), 마조(馬祖)는 입처즉진(入處卽眞)이라 했다. 눈앞에 역력한 이것이 그대로 진리이며 도이고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진리를 벗어날 수 없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돈오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 있는 이 진실을 떠나 다른 곳에 갈 이유가 없다. 지금 이대로의 진실을 온전히 받아들여 살아간다. 다시는 삶과 싸우지 않고,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억울해하지 않으며,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즐기고, 가지고 놀 듯이 살 뿐이다. 이렇게 사는 삶을 유희삼매(遊戱三昧)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삶은 이토록 가볍고 유쾌하며 그 무엇에도 얽매임 없이 노닐며 살아가는 곳이다. 이것이 삶의 본질이다. 그러니 점수와 보임이라는 수행의 길은 결코 힘들고 괴로운 것이 아니다. 돈오 이후의 삶이야말로 진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거짓을 진짜라고 여겨 집착하던 허망한 삶에서 깨어나 참된 진실이 무엇인지 비로소 확인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글쓴이:법상
이 돈오 이후의 점수에 대해서 지눌 스님은 다시 이렇게 설한다.
“점수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 온 습기(習氣)는 갑자기 제거하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해 수행하고 점점 익혀서 공(功)을 이루고, 또 오랫동안 성인의 자질을 잘 길러나가야 성인이 되는 것이므로 점수라 한 것이다. 비유하면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이 갖추어져 있음은 어른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은 충분하지 못하므로 많은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과 같다.”
비록 본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 온 습기는 갑자기 제거하기 어렵다. 그래서 돈오의 깨달음에 의지해 수행하고 점점 익혀서 깨달음이 확고하게 자리 잡도록 하고, 이를 통해 자유자재한 깨달음의 삶이 구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점수(漸修)이다. 오랜 시간 보임을 통해 성인의 자질을 길러나가야 하므로 점수라고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점수는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이 갖추어져 있지만, 아직 어른이 되기에 충분하지 못한 것과 같다. 적어도 20~30년은 지나야 어른으로서 제 할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 점수의 수행도 아기가 성인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점수의 수행에 있어서 너무 보채거나 억지로 빨리 끝내려고 유위조작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점수의 수행을 할 때는 억지로 열심히 하려고 애쓰기보다 자연스럽게 놀이하듯 힘을 빼고 삶의 흐름을 타야 한다.
주어진 삶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허용함으로써 삶과 싸우지 않게 된다. 우리는 내 뜻대로 안 될 때 괴롭고, 내 뜻대로 되면 행복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런 ‘내 뜻’을 따로 내세워 집착하지 않게 되면, 주장하고 집착할 ‘내 뜻’이 없어서 언제나 자연스럽게 흐를 뿐이다. 이렇게 되어도 좋고, 저렇게 되어도 좋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없이 산다는 것은 아니다. 자기 뜻도 있고, 판단도 있고, 분별도 한다. 오히려 중생보다 더욱 효율적으로 분별하고, 더욱 직관적으로 판단한다. 판단에 주저함이 없고, 많은 생각으로 인해 깊은 고뇌에 빠지지 않는다. 삶이 가볍게 흘러간다. 주장할 ‘내 뜻’이 없으니, 내 뜻과 맞지 않는 사람과 다툴 일도 사라진다. 물론 때로는 업습에 끌려서 자기 생각을 주장하기도 하겠지만, 오뚝이가 금방 다시 자리를 잡듯이 법의 힘으로 다시금 법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이처럼 돈오한 자는 돌아올 법의 자리가 확고해진다. 예전에는 뭐가 뭔지도 몰랐다. 삶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것인지도 모른 채 생각과 분별에 끌려다니며 이리저리 휘둘리고 살았다. 이제는 나와 삶의 진실에 눈을 떴기 때문에 물결처럼 휘둘리지 않는다. 잠시 생각과 분별에 끌려갔을지라도 ‘돌아올 법의 자리’가 확보되었기 때문에 마음에 굳건한 중심이 생겨난 것이다. 잠깐 휘둘렸다가도 다시 돌아올 힘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점수의 수행 아닌 수행이다. 이것은 수행이라고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러운 내맡김의 과정이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허용하는 대수용의 공부다. 법신불을 자수용신(自受用身)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일체경계를 분별하거나 취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제는 ‘나’가 따로 있고, ‘세상’이 따로 있어서 내가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이고 세상이 나이다. 내가 경계이고 경계가 나이다. 내가 바로 너이고, 네가 바로 나이다. 둘이 아닌 하나의 자성 자리가 확고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경계나 상황이 오면, 그 상황을 ‘내가’ 통제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상황을 주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상황 자체가 이미 진실임을 안다. 주어진 삶 자체가 진리임을 안다.
삶 전체가 불이법으로써 통으로, 전체성으로 하나의 부처이다. 온 우주와 삶 전체가 그대로 법신불이다. 그리고 삶의 내용물은 중중무진의 인과 연이 화합하여 연기법으로써 운행된다. 이것이 곧 불(佛)이고 법(法)이다. 삶은 이처럼 불법에 따라 흐른다. 거기에 ‘나’는 없다. 내 뜻대로 운행되는 것이 아니라 연기법에 따라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이와 같은 불법에 통달한 사람이라면, ‘내 뜻’대로 삶을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삶은 내 뜻대로 통제되는 곳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러니 ‘내 뜻대로’ 살려고 하던 삶에서, ‘부처님 뜻대로’, ‘인연따라’, ‘불법에 내맡기며’ 살아가는 삶으로 전환된다. 삶을 주도해 오던 ‘나’가 빠지는 것이다.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다. 추구하는 것도 없다. 할 것이 없지만, 하지 못할 것도 없다. 하되 함이 없이 무엇이든 다 한다. 이것이 와도 좋고 저것이 와도 좋다.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거나, ‘결코’ 저렇게 되면 안 될 것이 없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알아서 아는 것이 아니다. 오직 모를 뿐이다. 모르지만,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고 분별없이 삶에 내맡긴다. 안다는 것은 중중무진의 연기법을 자기 생각으로 헤아린다는 뜻인데, 어떻게 그 다함 없는 연기를 다 알 수 있겠는가?
내 쪽에서 통제하지 않고 ‘불법’이 완벽하게 저절로 통제되고 있음을 믿는다. 이런 것이 참된 믿음이다. 내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불법을 믿는 것이다. 삶을 통째로 믿는 것이다. ‘나는 진급해야 해’,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붙어야 해’, ‘돈을 얼마만큼 벌어야 해’ 등의 내 생각을 믿지 않고,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런 생각, 분별이 없는 삶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서도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나 집착이 없다. 삶이 본래 완전하게 흐름을 굳게 믿는다. 내가 삶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삶이기에, 삶의 흐름에 든다.
그렇다고 열정도 없고, 열심히 살지도 않으며 게을러지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이 중중무진 연기법의 중요한 일부임을 알기에,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일한다. 다만 결과는 내 뜻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알기에 내맡긴다. 이런 삶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얼마나 걸림 없을까?
삶은 본래 그대로 완전하기에, 완전한 삶에 그저 내맡기는 것이다.
이를 『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했다. 일체 모든 것이 그대로 참된 실상이라는 것이다. 임제 스님은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 하여 ‘서 있는 그 자리가 참된 진실의 자리’라 했고, 승조(僧肇)는 촉사이진(觸事而眞), 석두(石頭)는 촉목회도(觸目會道), 도오(道吾)는 촉목보리(觸目菩提), 마조(馬祖)는 입처즉진(入處卽眞)이라 했다. 눈앞에 역력한 이것이 그대로 진리이며 도이고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진리를 벗어날 수 없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돈오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 있는 이 진실을 떠나 다른 곳에 갈 이유가 없다. 지금 이대로의 진실을 온전히 받아들여 살아간다. 다시는 삶과 싸우지 않고,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억울해하지 않으며,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즐기고, 가지고 놀 듯이 살 뿐이다. 이렇게 사는 삶을 유희삼매(遊戱三昧)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삶은 이토록 가볍고 유쾌하며 그 무엇에도 얽매임 없이 노닐며 살아가는 곳이다. 이것이 삶의 본질이다. 그러니 점수와 보임이라는 수행의 길은 결코 힘들고 괴로운 것이 아니다. 돈오 이후의 삶이야말로 진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거짓을 진짜라고 여겨 집착하던 허망한 삶에서 깨어나 참된 진실이 무엇인지 비로소 확인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