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 점문, 열등한 근기의 정혜(1)
2025-07-29
조회수 295
17
3
iris2025-07-29 23:01
선정으로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로 무기(無記: 선악의 분별이 없는 혼미한 상태)를 다스리면 어지러움과 혼미함이 함께 없어지며, 이처럼 서로를 없앰으로써 다스리려는 노력도 끝이 난다.
이렇게 되면 경계를 마주하더라도 순간순간 근본으로 돌아가고, 반연을 만나도 마음 마음이 도에 계합하여, 걸림 없이 정혜를 쌍으로 닦게 되니 비로소 무사인(無事人: 일 없는 사람)이라 할 만하다.
글 감사합니다❤️
의식은 형상들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릴 만큼 복잡성에 이를 때까지 여러가지 형태로 변장합니다
오늘날의 인간들은 자신을 오로지 모양으로만 알고 있으므로
몸과 마음이 소멸될까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고통의 중압감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형태라는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과정을 '돌아온 탕자'라는 비유로 설명합니다
아들은 예전과 같으면서 같지 않습니다
더욱 깊어진 것입니다
이 비유는 완벽한 무지의 상태에서 시작해서 세속적 불완전함과
악을 거쳐, 완전한 깨어있음으로 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마음을 지켜볼 때마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형태로부터 후퇴합니다
그때 당신은 목격자나 관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켜보는 자로서의 의식이 점점 강해지면서 형상 뒤에 있는
순수의식이 되어 가고, 마음의 구조는 허물어져 가게 됩니다
마음을 지켜보는 자가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우주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언젠가는 먼 미래에 연대기적으로 펼쳐지는 시간이
정지할 것임을 예견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에크하르트 톨레
이렇게 되면 경계를 마주하더라도 순간순간 근본으로 돌아가고, 반연을 만나도 마음 마음이 도에 계합하여, 걸림 없이 정혜를 쌍으로 닦게 되니 비로소 무사인(無事人: 일 없는 사람)이라 할 만하다.
글 감사합니다❤️
의식은 형상들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릴 만큼 복잡성에 이를 때까지 여러가지 형태로 변장합니다
오늘날의 인간들은 자신을 오로지 모양으로만 알고 있으므로
몸과 마음이 소멸될까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고통의 중압감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형태라는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과정을 '돌아온 탕자'라는 비유로 설명합니다
아들은 예전과 같으면서 같지 않습니다
더욱 깊어진 것입니다
이 비유는 완벽한 무지의 상태에서 시작해서 세속적 불완전함과
악을 거쳐, 완전한 깨어있음으로 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마음을 지켜볼 때마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형태로부터 후퇴합니다
그때 당신은 목격자나 관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켜보는 자로서의 의식이 점점 강해지면서 형상 뒤에 있는
순수의식이 되어 가고, 마음의 구조는 허물어져 가게 됩니다
마음을 지켜보는 자가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우주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언젠가는 먼 미래에 연대기적으로 펼쳐지는 시간이
정지할 것임을 예견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에크하르트 톨레


그러나 업(業)의 장애는 두텁고 습기(習氣)는 무거우며, 관(觀)하는 힘은 약하고 마음은 들떠서 무명의 힘은 크고 지혜의 힘은 적으며, 선악의 경계에서는 마음이 고요함과 동요 사이를 오가는 이런 담담하지 못한 사람은 반연(攀緣)을 잊고 번뇌를 없애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육근이 경계를 대해도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는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고, 마음과 경계가 함께 공해서 미혹 없이 비추는 것을 지혜라 한다. 이것은 비록 상을 따르는 방편문[隨相門]에 속하는 정혜(定慧)라서, 점문(漸門)의 열등한 근기의 행이기는 하지만 경계에 따라 다스려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없을 수가 없다. 만약 도거(掉擧)가 치성한 경우에는 먼저 선정의 이치대로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서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공적(空寂)에 계합하게 해야 한다. 만약 혼침(昏沈)이 더욱 심해지면 이번에는 지혜로써 법에 따라 공(空)을 관(觀)하여 미혹 없이 비추어서 본래의 영지(靈知)에 계합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선정으로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로 무기(無記: 선악의 분별이 없는 혼미한 상태)를 다스리면 어지러움과 혼미함이 함께 없어지며, 이처럼 서로를 없앰으로써 다스리려는 노력도 끝이 난다. 이렇게 되면 경계를 마주하더라도 순간순간 근본으로 돌아가고, 반연을 만나도 마음 마음이 도에 계합하여, 걸림 없이 정혜를 쌍으로 닦게 되니 비로소 무사인(無事人: 일 없는 사람)이라 할 만하다. 만약 이렇게 하면 참으로 정혜등지(定慧等持)를 실천하여 불성을 밝게 본 사람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然障濃習重 觀劣心浮 無明之力大 般若之力小 於善惡境界 未免被動靜互換 心不恬淡者 不無忘 緣遣蕩功夫矣 如云六根攝境 心不隨緣 謂之定 心境俱空 照鑑無惑 謂之慧 此雖隨相門定慧 漸門劣機所行也 對治門中 不可無也 若掉擧熾盛 則先以定門 稱理攝散 心不隨緣 契乎本寂 若昏 沈尤多 則次以慧門 擇法觀空 照鑑無惑 契乎本知 以定治乎亂想 以慧治乎無記 動靜相亡 對治功終 則對境而念念歸宗 遇緣而心心契道 任運雙修 方爲無事人 若如是則眞可謂定慧等持 明見 佛性者也
돈오(頓悟)하고 나면, 법의 측면에서 본다면 돈오돈수(頓悟頓修)여서 몰록 깨닫고 몰록 수행도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현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돈오점수(頓悟漸修)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돈오점수라는 말은 그런 법칙이 있다기보다, 중생은 근기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돈오점수적 측면이 있음을 나타내는 방편이자 하나의 말일 뿐이다. 이것을 가지고 돈오돈수가 옳으냐, 돈오점수가 옳으냐 하고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돈오점수적 측면에서 본다면, 즉 현상적인 현실에서 본다면, 아무리 돈오해서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오랜 세월 익혀 온 업(業)의 장애가 두텁고 습기(習氣)가 무겁다. 또한 분별과 업습이 올라올 때 그것을 지켜보는 관(觀)의 힘이 약하고, 마음이 쉬 들뜨기 쉽다. 이렇듯 어리석음의 힘은 여전히 크고 지혜의 힘은 아직 작기에 선악의 경계에서는 마음이 고요함과 동요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여여하지 못한, 담담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바깥에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온갖 인연에 끌려가지 않는 공부, 번뇌를 없애는 공부를 여전히 해야 한다.
육근(六根)이 바깥 경계를 대해도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는 것을 선정이라 하고, 마음과 경계가 함께 공해서 미혹 없이 비추는 것을 지혜라 한다. 이것은 현상적인 측면, 상을 따르는 측면에서의 방편문인 수상문(隨相門)에 속하는 선정이다. 점수의 행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열등한 근기의 수행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대부분 사람에게 해당한다. 말은 열등, 우등이라고 나누었으나, 엄밀히 말한다면 근기의 우열이라기보다 법의 자리에서 보면 돈오돈수라서 닦음이 필요 없지만, 현실의 상(相)에서 보면 돈오점수라서 경계를 따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