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반야(般若) - 반야, 불이중도의 이해
2025-12-01
조회수 117
14
8
행복2025-12-02 00:08
큰 도는 항상 눈앞에 있지만 보기 어렵다
둘로 셋으로 쪼개는 망상만 부리지
않음 본래로 지금 이자리에 언제나 드러나 있는 실상반야 법의 성품을 보리라
감사합니다 🙇♀️
둘로 셋으로 쪼개는 망상만 부리지
않음 본래로 지금 이자리에 언제나 드러나 있는 실상반야 법의 성품을 보리라
감사합니다 🙇♀️

iris2025-12-01 22:29
둘로 나누는 분별망상만 없으면
지금 이 자리에 언제나 드러나 있는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글 감사합니다❤️
개념은 학습된다
개념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개념은 본래주어진 것이 아니며 만들어져야 한다
단 하나의 개념도 진짜가 아니며, 대부분의 개념이 두려움에서 태어난 증오와 왜곡으로 한껏 들뜬 상상물에서 나온다
세상은 항상 자아개념에 엄청나게 몰두해 왔다
구원은 단지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너의 자아를 상징 속에서 구하지 말라
너의 정체를 나타낼 수 있는 개념은 있을 수 없다
네가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 한,
세상은 너에 대한 어떤 이미지도 가르칠 수 없다
바로 이렇게 봉인이 해제되어 열린 마음으로
속박에서 풀려난 진리가 물밀듯이 들어온다
자아 개념을 내려놓은 곳에서 진리는 정확히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의문과 질문이라는 빛을 투사함으로써 모든 개념이 거짓임이 드러날 때
진리는 죄의식이 없는 자신의 깨끗한 성소로 자유로이 들어온다
다음의 말보다 세상이 더 듣기 두려워하는 것은 없다
나는 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내가 무엇을 하고 어디에 있는지,
세상이나 나 자신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여기서부터 구원이 탄생한다
그리고 너의 정체가 스스로 너에게 말해줄 것이다
-A course in Miracles
지금 이 자리에 언제나 드러나 있는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글 감사합니다❤️
개념은 학습된다
개념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개념은 본래주어진 것이 아니며 만들어져야 한다
단 하나의 개념도 진짜가 아니며, 대부분의 개념이 두려움에서 태어난 증오와 왜곡으로 한껏 들뜬 상상물에서 나온다
세상은 항상 자아개념에 엄청나게 몰두해 왔다
구원은 단지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너의 자아를 상징 속에서 구하지 말라
너의 정체를 나타낼 수 있는 개념은 있을 수 없다
네가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 한,
세상은 너에 대한 어떤 이미지도 가르칠 수 없다
바로 이렇게 봉인이 해제되어 열린 마음으로
속박에서 풀려난 진리가 물밀듯이 들어온다
자아 개념을 내려놓은 곳에서 진리는 정확히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의문과 질문이라는 빛을 투사함으로써 모든 개념이 거짓임이 드러날 때
진리는 죄의식이 없는 자신의 깨끗한 성소로 자유로이 들어온다
다음의 말보다 세상이 더 듣기 두려워하는 것은 없다
나는 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내가 무엇을 하고 어디에 있는지,
세상이나 나 자신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여기서부터 구원이 탄생한다
그리고 너의 정체가 스스로 너에게 말해줄 것이다
-A course in Miracles
iris2025-12-02 23:23
@행복
네가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 한,
세상은 너에 대한 어떤 이미지도 가르칠 수 없다
저는 이 부분이 리마인드가 됐는데요
옛날 부처님이 사구게를 하나 얻으려고 나찰에게 목숨을 던지는 장면을 생각해보면
이토록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세상이라니 참 놀랍죠
목숨까지 요구하는 불친절한 사구게도 아닌,
아무 조건없이 주어진 저 부드럽고 온유한 글을 10번만
천천히 정독해도 바로 정각의 길로 들어갈 수 있거든요
지금 세상은 너무나 넘치게 주어져 있고, 늘 우리를
진리의 길로 편안히 이끌어주고 계심을 느낍니다
공감 감사합니다❤️
세상은 너에 대한 어떤 이미지도 가르칠 수 없다
저는 이 부분이 리마인드가 됐는데요
옛날 부처님이 사구게를 하나 얻으려고 나찰에게 목숨을 던지는 장면을 생각해보면
이토록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세상이라니 참 놀랍죠
목숨까지 요구하는 불친절한 사구게도 아닌,
아무 조건없이 주어진 저 부드럽고 온유한 글을 10번만
천천히 정독해도 바로 정각의 길로 들어갈 수 있거든요
지금 세상은 너무나 넘치게 주어져 있고, 늘 우리를
진리의 길로 편안히 이끌어주고 계심을 느낍니다
공감 감사합니다❤️
강아지송아지2025-12-01 11:54
마음공부할 때
모든 감정에는 짝이 있다고 하잖아요
기쁨 슬픔
배고픔 배부름
좋고 싫음
이런게 결국은 한끗차이라서
끌어당기기할 때 잘못하면
부를 끌어당겼는데 가난이 오기도 하고 그렇다고 한다네요
^-^;;; 왠지 저도 경험해 본 거 같아요
웃프네요
중도의 중요성
모든 감정에는 짝이 있다고 하잖아요
기쁨 슬픔
배고픔 배부름
좋고 싫음
이런게 결국은 한끗차이라서
끌어당기기할 때 잘못하면
부를 끌어당겼는데 가난이 오기도 하고 그렇다고 한다네요
^-^;;; 왠지 저도 경험해 본 거 같아요
웃프네요
중도의 중요성

행복2025-12-02 01:21
마음에너지는 참 신묘합니다
오면 안돼~ 이것만 와야 돼~....라고
자꾸 내보냈더니....
아이러니 하게도
오면 안돼가 현실이 되더라구요
참 웃프죠^^
모른다 모른다 나는 모른다
그냥 무조건/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연습합니다
오면 안돼~ 이것만 와야 돼~....라고
자꾸 내보냈더니....
아이러니 하게도
오면 안돼가 현실이 되더라구요
참 웃프죠^^
모른다 모른다 나는 모른다
그냥 무조건/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연습합니다
강아지송아지2025-12-02 09:53
저도 인터넷에서 가져온 거라 ^^;;
화장품병인가봐요 ㅎㅎㅎ
다들 귀여워하시니 저도 좋네요
그런 에너지들을
끌어당겼다 밀었다 하면서 균형을 맞추는건가봐요
화장품병인가봐요 ㅎㅎㅎ
다들 귀여워하시니 저도 좋네요
그런 에너지들을
끌어당겼다 밀었다 하면서 균형을 맞추는건가봐요

반야는 곧 무분별지라고 했는데요, 이것은 앞으로 나올 『반야심경』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며, 불교의 핵심이 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조금 더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가 중도(中道), 불이법(不二法), 불이중도(不二中道)입니다. 즉 반야지혜가 곧 중도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이며, 불이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불이법은 둘로 나누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세상을 바라볼 때 언제나 대상을 둘로 나누어 놓고 그 두 가지를 비교해야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학교에서 성적을 90점을 받아왔다면 그것만을 가지고 부모님은 자식이 공부를 잘 하는지 못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학급 평균은 몇 점인지, 다른 친구들이 몇 점을 맞았는지, 자식이 몇 등인지를 알아야만 내 자식이 공부를 잘 하는지 못하는지를 선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그것 자체만을 가지고는 알 수 없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알음알이를 불교에서는 둘로 나누어서 안다고 해서 ‘분별심’이라고 합니다. 경전에서는 ‘식(識)’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바로 이러한 분별심 때문에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대상을 차별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럼으로 인해 괴로움이 생기게 되었다고 봅니다.
둘로 나눠 놓고 좋거나 나쁜 것, 옳거나 그른 것, 잘나고 못난 것, 적과 아군 등으로 나누어 놓게 되면 좋은 것, 옳은 것, 잘난 것은 더 많이 가지고 싶어 집착하게 되고, 반대인 것은 싫어서 거부하게 됩니다. 좋고 싫은 것이 있으면 좋은 것에는 집착하고, 탐심(貪心)을 일으켜 붙잡으려 하지만, 싫은 것은 거부하고 밀쳐내려고 하며 화나 짜증 등의 진심(嗔心)을 일으킵니다. 탐심과 진심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치심(癡心)은 바로 이렇게 둘로 나누어 놓는 마음입니다. 이게 바로 초기경전에서 해탈 열반을 탐진치 삼독의 소멸이라고 하셨던 바로 그 탐진치 삼독(三毒)입니다. 즉 삼독의 소멸이 곧 열반이라고 할 때, 이 말은 곧 분별심 즉 이법(二法)으로 나누어 놓는 마음만 없으면 곧 깨달음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분별해서 둘로 나누어 놓는다는 것 자체가 어떤 대상에 대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등의 상(相)을 부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분별하는 모든 대상은 상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하여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바로 여래를 본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 바로 이 둘로 나누는 분별심이 우리의 깨달음을 막는 유일한 장애물인 것입니다. 바로 이 둘로 나누는 분별망상만 없으면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언제나 드러나 있는 실상반야,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승찬스님은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둘로 나누어 선택하지만 않으면 된다.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해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내 머릿속의 해석과 판단과 분별 속의 삶만을 살아오느라 이 눈앞에 드러나 있는 생생한 진짜 삶을 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을 보더라도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으로 해석하고 분별한 생각 속의 한 사람을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불법을 바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분별하지 말라고 하고, 극단에 치우치지 말라고 하고, 중도적으로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도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둘로 나누어 놓고 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그런 극단을 버리고, 다만 대상을 비교, 차별, 분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볼 것을 주문합니다.
그래서 지공화상은 『대승찬』에서 “큰 도는 항상 눈앞에 있지만, 보기는 어렵다. 애써 분별하여 모양을 취하지 않으면 잠깐 사이에 저절로 도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분별하여 분별상을 취하지만 않으면 곧장 도를 보게 된다는 것이지요.
좋거나 나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중도이고, 불이법이며, 불이중도의 지견입니다. 그것이 바로 반야라는 무분별지이지요.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