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반야(般若) - 반야지혜로 바라보면 -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다

2025-12-02
조회수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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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나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이득이 되는 것인지 손해가 되는 것인지를 자동적으로 인식하곤 합니다. 그래서 좋거나 득 되는 것은 애착하면서 어떻게든 더 붙잡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반대로 싫거나 손해가 되는 일이라고 여기면 어떻게든 거부하고, 밀쳐내려고 애쓰며 화를 내고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일에 대해 우리가 판단하고 분별한 것처럼 좋거나 나쁜 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의 판단이 좋거나 나쁘다고는 했지만, 그것이 근원적으로 나에게 정말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어떤 사람이 초기 암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우연히 정기 검진에서 암 진단을 받고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괴로워하겠지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초기에 암 진단을 받음으로써 성공적으로 수술을 끝내고, 그 이후에 몸에 대해 더 많이 관심을 가지고, 운동도 하고, 술 담배도 끊고, 건강을 잘 지킴으로써 남은 인생을 건강하게 보낼 수 있었다면 오히려 암 진단이 이 사람을 도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최악의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고도 고마운 사건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어떤 한 사건을 가지고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새옹지마란 말처럼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어떻게 변하게 될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초기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 둘로 나누는 분별심을 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즉 암 진단을 최악의 괴로운 상황으로 보면서 세상을 원망하거나, 다행히 초기에 발견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보는 이 두 가지의 관점 모두를 선택하지 않고 다만 무분별로 바라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었을까요? 사실 초기암 진단이라는 좋거나 나쁘다는 그 어떤 실체도 없는 중립적인 상황에 불과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저마다의 판단분별로 좋거나 나쁜 쪽으로 분별심을 몰아감으로써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하고, 감사해 하기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얽어 메고 있습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며, 괴롭게 만드는 것도 자기 자신일 뿐입니다.

둘로 나누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이 바로 깨달은 자의 삶의 방식일 텐데요, 깨달은 사람이라고 암 진단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깨달은 자는 암진단을 받고도 다른 사람들처럼 둘 중 하나의 상황으로 생각을 몰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분별심을 일으켜 어느 한 쪽으로 현 상황을 해석하지 않는 것이지요. 몸속에 암은 있었지만 암진단을 받지 않았을 때는 우리도 암으로 인해 괴롭지 않겠지요? 그와 같이 몸 속에 암이 있느냐 없느냐가 나를 기쁘게 하거나 괴롭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죽을 때까지 암을 달고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이 암인 줄 모르면서 잘 살다가 가는 경우도 많다고 하더군요.

사실 상황 그 자체는 우리를 괴롭힐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언제나 그것은 나의 선택일 뿐입니다. 생각으로 허망한 착각과 괴로움을 스스로 만들어내 그 속에 빠져드는 무승자박의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아무런 해석이나 분별을 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삶을 그저 사는 것을 선택할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법은 자신이 만든 분별의 세계 속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닌, 지금 이대로 해석되지 않은 날 것의 불이중도로, 반야지혜라는 정견으로 자유롭게 걸림 없이 사는 삶입니다.

이처럼 반야지혜라는 불이중도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곧장 참된 본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이대로 부처이지만 분별심에 가로막혀 스스로 만든 분별의 세계만을 보며 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투명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지 못하고, 생각으로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 속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불이중도와 반야지혜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은 곧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견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 견성(見性)입니다. ‘이것’을 바로 보게 해 주는 지혜가 바로 반야지혜인 것이지요.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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