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 십이처

2026-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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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우리는 육근을 통해 외부의 대상을 인식하여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안의 감각기능, 감각활동인 육근을 통해 외부의 대상인 육경을 인식하다 보니, 내 안에 육근이 진짜로 있고, 내 밖에는 육경이 진짜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됩니다. 내 안에 감각활동을 하는 ‘나’라는 존재가 진짜로 있다고 여기고, 내 바깥에 그 감각의 대상인 ‘세계’가 진짜로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나’와 ‘세상’이 둘로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분별심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 때, 육근이라는 인연 따라 생겨난 감각기능과 활동을 ‘나’라고 여기는 허망한 착각을 육내입처(六內入處) 혹은 육내처(六內處)라고 하고, 그 감각 대상을 ‘세계’라고 실체적으로 생각하는 허망한 착각을 육외입처(六外入處) 혹은 육외처(六外處)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육근, 육경과 육내입처, 육외입처는 조금 다른 것이지요. 즉 ‘육근’은 인연 따라 생긴 우리 안의 여섯 가지 감각기능과 감각활동을 의미하고, ‘육내입처’는 그 육근을 보고 ‘나’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의식을 뜻합니다.

육근과 육경은 감각기능과 감각활동, 감각능력과 그 대상으로써 없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는 육근과 육경을 ‘나’라고 집착하고, ‘세계’라고 집착하는 허망한 착각의 망상이기 때문에 없애야 할 것들입니다. 육근은 청정해져야 하지만, 육내처와 육외처는 결국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이연기에서도 명색과 육입을 소멸시켜야 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명색과 육입이 곧 육외처와 육내처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나’와 ‘세계’라고 분별하여 나누는 허망한 착각, 즉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를 합쳐 십이처(十二處)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일체’ 혹은 ‘삼라만상’이라고 부를 때 바로 그 일체가 곧 십이처입니다.

『잡아함경』에서는 “일체란 곧 십이처이니,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뜻과 법이다. 이것을 일체라 한다. 비구들아, 만약 어떤 사람이 ‘이것은 일체가 아니다. 나는 십이처를 떠난 다른 존재를 찾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며, 알려고 해도 의혹만 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인식론의 특징입니다. 육내입처와 육외입처 즉 우리에게 감각되고 지각되어 분별된 세계만을 ‘일체’, 즉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 앞에 100명, 1000명의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 모두를 똑같이 인식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특정한 한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사랑하는 한 사람만 눈에 띄고, 그 사람으로 인해 그 곳이 아름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내 앞에 무엇이 있느냐 하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거기에서 무엇을 느낄 것이냐, 눈귀코혀몸뜻으로 어떤 것을 중점적으로 의식할 것이냐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육내입처와 육외입처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허망하게 생겨난 망상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육내입처가 내 밖의 세상 즉 육외입처에 있는 수많은 대상들 가운데 어떤 특별한 대상들만을 선택적으로 취사선택해서 좋아하고 싫어할 것이냐 하는 점에 따라 나의 세계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이 있다면 백 명이 느끼는 세계는 전부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계라는 실체적인 곳이 정해져 있어서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라면, 그 세계가 좋고 나쁘냐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것도 정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육내입처가 육외입처를 어떻게 인식하여 분별심을 일으킬 것인지에 따라 똑같은 세계가 좋아지기도 하고 싫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교에서 ‘일체’, ‘삼라만상’, ‘모든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허망한 망상의 세계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짜로 ‘있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착각의 세계, 허망한 분별의 세계, 즉, 헛된 마음의 세계일 뿐입니다. 마음속에서 보고 듣는 ‘자’가 있고, 보이고 들리는 ‘대상’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일체유심조인 것이지요. ‘일체’는 곧 마음이 만들어 낸 허망한 착각의 세계일뿐입니다.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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