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이 이미 갖추고 있는 진정한 공덕, 굳이 말한다면 이 몸뚱이에 갇힌 제한된 나, 거짓 나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 본래면목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거짓 나를 진짜 나라고 생각하니까 작은 육신에 갇혀 있는 작은 내가 비좁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고, ‘어떻게 하면 몇 년 더 오래 살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돈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좀 더 칭찬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넓은 아파트로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제한된 이 몸을 나라고 여기는 동안에는, 고작 해 봐야 이 몸이라는 작은 나를 확장하고, 내 것을 늘리려는 생각밖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육신에 갇혀 있는 나가 진정한 참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나는 언제나 지금 여기 있습니다. 물론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를 설하지, 참나라는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여기에서는 그저 임시방편으로 이해를 위해 써 보겠습니다.
보통 사람들, 중생들은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아, 나는 비좁은 나에 갇히고 싶지 않아. 어리석은 육신에 갇힌 나를 버리고 불성을 깨달은 내가 되고 싶어. 그런데 그것은 쉽지 않아. 드넓은 고해 바다를 건너야 저 피안(彼岸)의 언덕에 이를 수 있는데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겠어. 부처님도 힘들게 도달했고, 10년 20년 장좌불와(長坐不臥)한 큰스님들, 몇 안거(安居)를 했다는 스님들도 힘들다 하고, 몇 겁을 나고 죽고 반복하면서도 가기 힘든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어. 보현보살이 말한 이 무량한 공덕은 부처님의 공덕일 뿐이야. 나는 이렇게 어리석은데 부처님은 참으로 대단하시구나. 나는 부처님 발톱 밑의 때만큼도 안 되겠지만 그걸 믿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위안으로 삼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대부분 중생이 경전을 읽으며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보현보살의 말씀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보현보살이 국어 문법에도 맞지 않는 것 같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여러분이라는 부처님이 본래 그렇게 무한한 공덕을 가진 존재인데 왜 이렇게 어리석은 거짓 나에 갇혀서 언제까지 그러고만 살 것인가? 언제까지 몸이 나인 줄 알고, 생각이 나인 줄 알고, 내 재산이 내 것인 줄 알고, 내 자식, 내 남편, 내 것, 내 것 하면서 나와 내 것에만 갇혀서 살 것인가?’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함입니다.
길어야 백 년 인생입니다. 이제 30년이 남았을지, 40년이 남았을지, 당장 내일 갈지 알 수 없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에 보배를 이미 갖추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괴로움 속에 파묻혀 어리석게 살다가 가시겠습니까? 그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만져본 적도 없고, 부처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도저히 자신이 부처라는 게 상상이 안 될 것입니다. 한 번도 부처를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25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 이후에는 깨달은 사람도 없는 것 같고, 나 자신도 깨달음은 상상도 못 하겠는데 어찌 내가 깨달을 수 있겠느냐?”라고 얘기하는 게 이해가 갑니다.
글쓴이:법상
여러분이 이미 갖추고 있는 진정한 공덕, 굳이 말한다면 이 몸뚱이에 갇힌 제한된 나, 거짓 나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 본래면목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거짓 나를 진짜 나라고 생각하니까 작은 육신에 갇혀 있는 작은 내가 비좁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고, ‘어떻게 하면 몇 년 더 오래 살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돈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좀 더 칭찬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넓은 아파트로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제한된 이 몸을 나라고 여기는 동안에는, 고작 해 봐야 이 몸이라는 작은 나를 확장하고, 내 것을 늘리려는 생각밖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육신에 갇혀 있는 나가 진정한 참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나는 언제나 지금 여기 있습니다. 물론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를 설하지, 참나라는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여기에서는 그저 임시방편으로 이해를 위해 써 보겠습니다.
보통 사람들, 중생들은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아, 나는 비좁은 나에 갇히고 싶지 않아. 어리석은 육신에 갇힌 나를 버리고 불성을 깨달은 내가 되고 싶어. 그런데 그것은 쉽지 않아. 드넓은 고해 바다를 건너야 저 피안(彼岸)의 언덕에 이를 수 있는데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겠어. 부처님도 힘들게 도달했고, 10년 20년 장좌불와(長坐不臥)한 큰스님들, 몇 안거(安居)를 했다는 스님들도 힘들다 하고, 몇 겁을 나고 죽고 반복하면서도 가기 힘든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어. 보현보살이 말한 이 무량한 공덕은 부처님의 공덕일 뿐이야. 나는 이렇게 어리석은데 부처님은 참으로 대단하시구나. 나는 부처님 발톱 밑의 때만큼도 안 되겠지만 그걸 믿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위안으로 삼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대부분 중생이 경전을 읽으며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보현보살의 말씀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보현보살이 국어 문법에도 맞지 않는 것 같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여러분이라는 부처님이 본래 그렇게 무한한 공덕을 가진 존재인데 왜 이렇게 어리석은 거짓 나에 갇혀서 언제까지 그러고만 살 것인가? 언제까지 몸이 나인 줄 알고, 생각이 나인 줄 알고, 내 재산이 내 것인 줄 알고, 내 자식, 내 남편, 내 것, 내 것 하면서 나와 내 것에만 갇혀서 살 것인가?’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함입니다.
길어야 백 년 인생입니다. 이제 30년이 남았을지, 40년이 남았을지, 당장 내일 갈지 알 수 없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에 보배를 이미 갖추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괴로움 속에 파묻혀 어리석게 살다가 가시겠습니까? 그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만져본 적도 없고, 부처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도저히 자신이 부처라는 게 상상이 안 될 것입니다. 한 번도 부처를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25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 이후에는 깨달은 사람도 없는 것 같고, 나 자신도 깨달음은 상상도 못 하겠는데 어찌 내가 깨달을 수 있겠느냐?”라고 얘기하는 게 이해가 갑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