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 자성문의 정혜와 수상문의 정혜 관련 질문

202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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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었다.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돈오 후에 점수하는 문’에는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진다는 말에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성(自性)의 선정과 지혜이고, 둘째는 상을 따르는[隨相] 선정과 지혜입니다. 자성문(自性門)에서 보면, ‘공적(空寂)과 영지(靈知)를 자재하게 운용하는 것이 본래 무위(無爲)여서 상대할 대상이 한 티끌도 없으니, 어찌 번뇌를 없애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망정(妄情)을 일으킬 한 생각도 없으니, 반연을 잊으려 힘쓸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결론지어 말하길, ‘돈문(頓門)에 들어간 사람이 자성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수상문(隨相門)에서 보면, ‘이치에 따라 산란한 마음을 거두고, 법에 따라 공을 관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서 무위에 들어간다’라고 하며 결론지어 말하길, ‘이것은 점문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의 선정과 지혜에 대해서 여전히 의심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수행함에 있어서, 먼저 자성문의 선정과 지혜를 고루 닦은 뒤에 다시 수상문으로 경계를 다스리는 노력을 해야 합니까, 아니면 먼저 수상문에 의지해 혼침과 산란을 극복한 뒤에 자성문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만약 먼저 자성문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한다면, 공적과 영지를 자재하게 운용하여, 다시는 경계를 따라 다스리는 노력이 필요 없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수상문의 선정과 지혜를 취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는 마치 티 없는 옥에 무늬를 새겨 본래의 깨끗함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먼저 수상문의 선정과 지혜로, 경계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가 익어간 뒤에 자성문으로 나아간다면, 이는 점수문의 열등한 근기가 깨닫기 전에 점차로 닦아가는 공부와 같으니, 어째서 ‘돈문(頓門)의 사람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노력 없는 노력’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두 문이 전후가 없어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이 두 문의 선정과 지혜는 분명 돈점의 차이가 있는데, 어찌 동시에 병행하여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즉, 돈문의 사람은 자성문에 따라 자재하게 운용하여 노력할 것이 없고, 점문의 열등한 근기인 사람은 수상문을 따라 다스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돈문과 점문의 두 문은 서로 근기가 다르고 우열이 분명한데, 어째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문[先悟後修門]’ 가운데서 어떻게 두 가지를 동시에 말씀하십니까? 부디 회통(會通)하여 설하셔서 의심을 풀어 주십시오.”

 

問據汝所判 悟後修門中 定慧等持之義 有二種 一自性定慧 二隨相定慧 自性門則曰 任運寂知 元自無爲 絶一塵而作對 何勞遣蕩之功 無一念而生情 不假忘緣之力 判云此是頓門箇者 不離自性定慧等持也 隨相門則曰 稱理攝散 擇法觀空 均調昏亂 以入無爲 判云此是漸門劣機所行也 就此兩門定慧 不無疑焉 若言一人所行也 爲復先依自性門 定慧雙修然後 更用隨相門對治之功耶 爲復先依隨相門 均調昏亂然後 以入自性門也 若先依自性定慧 則任運寂知 更無對治之功 何須更取隨相門定慧耶 如將皓玉 彫文喪德 若先以隨 相門定慧 對治功成然後 趣於自性門 則宛是漸門中劣機 悟前漸熏也 豈云頓門箇者 先悟後修 用無功之功也 若一時無前後則二門定慧 頓漸有異 如何一時竝行也 則頓門箇者 依自性門 任運亡功 漸門劣機 趣隨相門 對治勞功 二門之機 頓漸不同 優劣皎然 云何先悟後修門中 竝釋二種耶 請爲通會 令絶疑情


 

돈오 후 점수하는 문에서 선정과 지혜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성(自性)의 선정과 지혜이고, 둘째는 상을 따르는 수상(隨相)의 선정과 지혜다. 선정과 지혜는 곧 정혜(定慧)이다.

자성문(自性門)에서 본다는 것은 자신의 본래 성품 자리, 즉 법에서 보는 것이다. 성품 자리에서 본다면 공적과 영지는 본래 무위(無爲)요, 불이법이어서 상대할 대상이 있을 수 없다. 성품 자리는 본래 공적해서 티끌 하나 붙을 수 없으니 번뇌를 없애려는 노력이 필요치 않다. 망령된 분별이나 생각, 감정을 일으킬 것이 하나도 없으니, 바깥 인연을 없애려고 애쓰거나 잊으려 힘쓸 것도 없다. 이것이 곧 돈오한 사람이 자성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것이다.

본래 자리인 자성에서 보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그대로 근원에서는 아무 일이 없으니, 번뇌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어서 따로 번뇌를 끊을 것도 없다. 애써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선정을 닦을 것도 없으며, 지혜를 개발할 것도 없다. 자성 그대로가 곧 선정이며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자성문의 입장에서는 돈오돈수라고 할 수 있으니, 돈오 후 따로 선정과 지혜를 닦아갈 필요가 없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대로 정혜등지라서 무위로써 그저 일 없이 살아가더라도 정혜가 본래 구족되어 있다.

그러나 수상문(隨相門), 즉 상을 따르는 방편의 입장에서 본다면 점차적인 점수의 수행이 필요하다. 이치에 따라서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야 하고, 법에 따라 공을 관해야 하며, 혼침과 산란인 분별심을 고루 다스려서 결국 무위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을 점문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대부분 중생이 이와 같다. 열등한 근기라기보다는 본질적인 이(理)의 측면에서 보면 자성의 정혜여서 수행이 따로 필요치 않으나, 방편인 현실적인 사(事)의 측면에서 보면 수상의 정혜여서 점차적인 점수의 수행이 필요하다.

 

여기에 제자는 궁금증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자성문의 정혜를 먼저 닦고 뒤에 수상문의 수행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수상문의 정혜로 수행해서 혼침과 산란을 극복한 연후에 자성문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만약 먼저 자성문의 정혜에 의지한다면, 이미 공적영지를 자재하게 운용하여 다시는 수행이 필요 없을 것인데, 왜 다시 수상문의 정혜를 닦을 필요가 있는가? 이는 티도 없는 깨끗한 옥에 티끌을 묻히는 것과 같아 도리어 깨끗함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만약 먼저 수상문의 정혜로 마음을 다스린 뒤에 자성문으로 나아간다면, 이는 곧 돈오 이전에 열등한 근기가 점차로 닦아 나가서 돈오해야 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이것을 ‘돈문의 사람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노력 없는 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가 쓸데없이 머리를 굴려 티 없는 깨끗한 옥에 티끌을 묻히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궁금함이 사라지지 않으니 이런 질문을 한 것 같다.

만약 이 두 문이 전후가 없어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이 두 문의 정혜는 분명 돈점의 차이가 있는데, 어찌 동시에 병행하여 행할 수가 있겠는가? 즉 돈문의 사람은 자성문에 따라 자재하여 노력이 필요 없고, 점문의 사람은 열등하여 수상문을 따라 다스려야 한다. 이처럼 돈문과 점문은 서로 근기가 다른데, 어째서 선오후수의 가르침 속에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스스로 자성을 밝히지 못하면 자성과 수상, 즉 본질과 현실, 이(理)와 사(事)에 대해 이런 혼돈이 오게 마련이다. 다음 장에서 과연 이런 우매한 질문에 지눌 스님이 어떤 답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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