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마음공부]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2021-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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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무지 역무득

 

위에서 『반야심경』은 일체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존재를 모두 부정하고 있으며, 이어서 그 현상계를 조견(照見)했을 때 나타나는 진리인 사성제와 십이연기까지도 차례로 부정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부정의 논리를 통해서 공의 세계를 드러내는 이유는, 지혜, 즉, 반야바라밀을 체득하기 위함이며, 그 지혜에 의지해서 모든 보살은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나 열반의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는 우리가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더 이상 부정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긴 ‘근본’에 대한 부분까지 모두를 부정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는 더 이상 부정해서는 안 될 지혜 즉, 반야바라밀과 그 지혜를 통해 얻어지는 깨달음, 열반까지 모두를 부정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반야심경』이 부정의 논리를 통해 공의 세계를 드러내는 마지막 부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혜(慧)란 우리가 현상계의 조견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의 안목이며, 얻을 것[得]이란 그 바른 지혜에 의해서 얻게 되는 깨달음의 세계, 즉, 해탈이며, 열반입니다. 즉, 이와 같은 두 가지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며, 최후의 목표인데도 불구하고 이 모두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지혜를 닦아 나가는 것입니다. 즉, 깨달음의 피안으로 가기 위해 고해[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는 배의 이름이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길이 지혜라고 하니, 모두가 이 지혜에 집착을 해 버립니다. 지혜를 증득하는 것에만 얽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이 지혜조차도 부정해 버립니다.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배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지혜라고 했을 때 분명 지혜조차도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꿈을 꾸고 있다가 이것이 꿈인 것을 올바로 알아[지혜] 꿈을 깼다고 했을 때, 꿈을 깨고 나면 꿈을 깨는 최상의 열쇠인 지혜마저도 없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니 우리가 바라 볼 것은 오직 깨달음, 열반의 기쁨뿐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득(無得)이라고 하여 반야심경에서는 궁극의 깨달음마저도 부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수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궁극적인 열반이요 해탈의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열반과 깨달음까지도 얻을 것이 없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파격의 끝까지 가서 완전히 우리 모두의 말문을 꽉 닫게 만드는 것입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지혜와 지혜를 통해 증득할 수 있는 깨달음인데, 그것조차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정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지혜와 깨달음을 부정하기 위한 부정이 아닙니다. 지혜와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도록 이끌기 위한, 온전한 지혜와 온전한 치우침 없는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났더니 모든 존재가 중생이었던 적은 없으며, 언제나 부처였고, 이미 깨달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즉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줄 알았는데, 깨닫고 보니 이미 원만한 부처였습니다. 지혜를 얻었다고 했지만 사실 누구 하나 미혹한 자는 없었습니다. 다만 바로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다만 착각하고 있었던 것 뿐입니다. 착각을 거두게 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착각만 거두면 되는데 거기에 무슨 지혜나 깨달음을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이라고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본래 깨달아 있었으나 잠시 신기루를 보듯 착각하여 중생인 줄 잘못 알았다가 이제 다시 바로 알게 되었으니 그것은 깨달음을 새삼스레 얻은 것이 아닙니다. 본래 지혜가 구족했었고, 깨달아 있었다는 것을 다만 바로 본 것일 뿐이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지혜도 없고 깨달음을 얻을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흡사 금강경의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라고 했던, 불법에도 집착하면 어긋난다는 가르침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지혜와 깨달음에도 집착하면 어긋나는 것, 깨달음과 열반을 말하면서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도록 이끄는 자유롭고 툭 터진 광대무변의 가르침, 그것이 바로 이 공부의 매력이자, 우리가 여기에 몸담고 있는 연유가 아닐까요.

 


이무소득고

 

이제 반야심경의 본론, 즉 부정을 통한 공의 선양을 나타내는 파사분을 끝낼 때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붙잡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라는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는 바로 모든 부정의 논리인 파사분을 전체적으로 덮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의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파사분에서는 일체 현상계의 존재인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부정하였고, 이어서 현상계의 조견을 통해 보았던 진리의 모습인 사성제와 십이연기도 부정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또한, 결국에 가서는 이 모든 부정의 논리의 궁극적 모습인 지혜와 깨달음마저도 부정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없다’ 라고만 하는 것일까? 그 이유가 바로 이 부분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를 설하는 연유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의 모두가 붙잡을 것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현상계도 없으며, 진리의 모습 또한 없고,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와 깨달음 그 자체도 없다는 것은 일체를 붙잡고 구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르는 말인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 ‘무소득’이라는 것은, 반야심경의 의미상 핵심을 이루는 단어입니다. ‘얻을 것이 없는’ 이유는 일체가 공이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제법이 공이라는 것이야말로 반야심경에서 설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본래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인 공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목적이 오직 ‘소득’에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행복은 무언가를 얼마나 많이 얻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꾸준한 소득, 얻음의 연장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처럼 딱한 세상의 논리에 철저히 길들여져 왔습니다. 이 세상의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에 사로잡혀 수동적인 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냉정히 생각을 돌이켜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은 과연 어떤 방향인가? 진리를 추구하는 방향, 진실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우리의 소신(所信)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 현실이 가지고 있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바로 공(空)입니다. 다시 말해, 연기이며, 무자성이고, 무아입니다. 이러한 진실에 걸맞는 생활 방식은 무집착이어야 하며, 무분별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에서 강조하는 무소득의 삶이며, 무소유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거꾸로 살아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본래로 텅 비어 공이기에 걷잡을 수 없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부여잡는 생활만을 하고 살아온 것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는 방향으로 생을 이끌어 온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을 과감히 바꾸어야 할 때에 왔습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리와 하나되는 삶의 모습으로 바꾸려는 큰 의식의 전환이 필요한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가 붙잡고 살아온 일체의 물질적, 의식적인 ‘내 것’의 관념을 과감히 놓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 것이다’하는 물질적인 소유관념과 ‘내가 옳다’라는 의식적인 고정관념을 비워버리는 삶으로의 대전환인 것입니다. 놓았을 때 일체를 소유할 수 있으며, 비워버렸을 때 일체가 꽉 차서 ‘마하(摩訶)’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한 티끌 속에도 시방(十方)을 머금을 수 있다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의 도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일체를 놓아버려야 한다는 ‘방하착(放下着)’이야말로 모든 실천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얻을 것이 없다는 무소득의 정신을 경전에 나타나는 경구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금강경』 제 2 권 제 1 사구계 제 26 법신비상분에, “만일 모양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거나 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또한 『금강경』 종결 사구게 제 32 응화비진분에, “일체 하염 있는 법[유위법(有爲法)]은 꿈・환영・물거품・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또한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같이 관할지어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라고 말하고 있으며, 뿐만아니라 『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 행림보살 찬불게에는, “만약 바른 생각으로 닦아 익혀 밝게 올바른 깨달음을 요달(了達)해 보면, 모양도 없고 분별도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법왕자(法王子)라 하리로다.(若修習正念 明了見正覺 無相無分別 是名法王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는 바로 일체의 모든 존재, 즉, 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라는 말로써 일체의 어떠한 존재에도 집착하여 붙잡을 것이 없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나아가 부처님, 즉, 열반 내지 깨달음에 대해서도 어떠한 상을 지으려 한다면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열반에 대해서도 집착하여 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무지역무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습니다. 『금강경』 제 1 권 제 1 사구게 제 5 여리실견분에, “무릇 상이 있는 바는 다 허망함이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즉, 일체의 모든 존재를 상이 있는 것으로 본다면 이는 허망한 것이며, 상을 깨고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아 집착하지 않아 구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체의 모든 사실은 어디에도 붙잡을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체 만유가 시간, 공간적으로 실제 존재한다는 상을 가지고 있고, 그러다 보니 스스로 지은 상으로 인해 집착을 하고, 분별심을 일으켜 온갖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어떠한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공’이 가지는 실천적 의미입니다.

여기까지가 본론격인 파사분(破邪分)입니다. ‘파사(破邪)’란, 말 그대로 ‘삿된 것을 깬다’는 말로서, 즉, 우리가 고정된 실체가 없는 모든 대상에 대해,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것에 집착하는 삿된 소견을 타파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집착을 타파하기 위해 이 파사분에서는 근본불교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설을 차례로 하나씩 부정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정의 논리를 통해 본래 공한 세계를 드러내 주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 파사분의 핵심인 것입니다.

다음 장에 나오는 공능분(功能分)은, 이상에서 설한 『반야심경』의 공능(功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이상에서 설명한 가르침에 의하여 보살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했을 때 나타나는 공능(功能), 즉, 이익에 대하여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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