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마음공부 2] 반야(般若)

2021-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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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반야심경의 개관
Ⅱ. 경의 제목

1장. 제경(諸經)의 제목에 대하여...
2장. 마하(摩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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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반야(般若)


‘반야(般若)’라는 말은 범어로 ‘프라즈냐(Prajna)’ 라고 하며,
팔리 어로는 ‘판냐(panna)’라고 합니다.
반야는 바로 팔리 어 ‘판냐’의 음역어로서,
마하와 같이 그 발음만 따서 옮긴 또 다른 예입니다.

이 또한 ‘마하’에서와 같이,
반야라는 의미를 중국말로 옮기기에 적당한 단어가 없었으므로,
그 의미가 퇴색됨을 우려해 따로 번역하지 않고
‘반야’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야’ 또한
우리 범부의 사량(思量)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일 것입니다.

반야를 굳이 번역한다면 ‘지혜(智慧)’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지혜가 아니라,
‘최고의 지혜, 즉 깨달음에 이르신 부처님의 밝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부처가 아닌 범부중생으로서
어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단어이겠습니까?

‘지혜’와 비슷한 단어로, ‘지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지혜’와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계산하고, 암기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극대화된 것이 ‘지식’이라 한다면,
‘지혜’는 이러한 범부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는 머리를 굴려 생각하고 분별하는 일련의 행위에 대해서
오히려 버리고 비울 것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생각에서 오는 지식은
오히려 우리의 정신세계를 복잡하고 혼란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지식은 업(業)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지식들을
모두 비우고 놓아버려야 합니다.
방하착(放下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의 맑은 불성(佛性),
본래면목 자리에 모두를 되돌려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간의 지식을 부여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이 ‘머리 굴리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지혜’라고 하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관조반야(觀照般若)’인데,
이것은 일체의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정견(正見)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제법(諸法)의 실상,
즉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고정된 바 없이 비춰 보는 지혜를 말합니다.

2,500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젊은 청년이
오랜 수행 끝에 성취한 깨달음의 지혜가 바로 관조반야인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어떤 신(神)과도 같은 절대적 존재에게서
깨달음을 받은 것이 아니며,
누군가의 도움으로 깨닫게 된 것도 아닙니다.
오직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아
현실 세계의 모습을 여실히 깨달은 것이니
이 지혜를 관조반야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실상반야(實相般若)’입니다.
실상반야는 제법의 실상 그 자체를 말합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의 모습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보는 자와 보여지는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는 자가 보이는 현실 세계, 우주와 하나가 되어 버릴 때
이것이 바로 실상반야인 것입니다.

이러한 실상반야를 우리가 올바로 깨달아 바르게 비추어 보게 되면,
이것이 바로 관조반야(觀照般若)인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일체의 모든 존재에 불성이 있고,
법신 부처님이 두루 편만(遍滿)해 계신다고 할 때,
바로 이것은 실상반야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방편반야(方便般若)’입니다.
이것은 문자반야(文字般若)라고도 불리는 것으로서,
이상의 실상반야와 관조반야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일체의 모든 경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반야는 아니지만,
반야지혜를 이끌어 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방편이 되는 것이므로
반야라고 합니다.

이러한 문자반야, 즉, 경전이 없다면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많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불법을 공부하는 모든 이에게 나침반과 같고,
뗏목과 같은 수단으로 쓰여
깨달음 즉 반야에 이르는 중요한 방편이 되어 주므로
방편반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상 삼종의 반야는
부처님의 지혜인 깨달음의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한
세 가지 단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
흔히 우리가 부처님의 지혜라고 일컫는 것은
진리의 당체(當體)인 실상반야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해서,
실상반야를 체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계를 밟아가야 합니다.
무조건 수행만 한다고 해서 반야를 체득하는 것도 아니요,
반대로 부처님 경전을 읽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팔만대장경을 줄줄이 꿰어도 헛고생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경전을 읽고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방편반야, 즉 문자반야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나오는 것이
바로 방편반야의 지혜인 것입니다.

이렇게 방편반야로 공부를 한 뒤에는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 실천이 바로 관조반야입니다.
관조반야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편견, 고정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실천 수행법입니다.

젊은 싯다르타가 깨달은 부처님이 되신 것 또한
바로 관조반야에 의해서인 것입니다.
이렇게 방편반야로 부처님의 법을 이해하고,
그 후 관조반야를 실천했을 때 나타나는
진리의 실상이 바로 실상반야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반야는
불교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 신해행증(信解行證)의 길과 비슷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신(信)’이 추가되었다는 점이라고 할까요.

믿는다는 것은 모든 불교 수행의 기본이 되는 밑거름입니다.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고, 절을 하고, 매일 절에 나와 불공을 드리고,
일상 생활 속에서 일체의 괴로운 경계를 방하착하며
비우는 실천을 행하는 이들이
열심히 수행 정진함에도 불구하고 쉽게 포기하는 이유가
바로 믿음의 결여 때문인 것입니다.
올곧은 믿음이 없기에 의심을 가지고 수행을 하게 되니,
이렇게 의심을 가지고 하는 수행에 어떤 힘이 붙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밑바탕이 되면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힘써 배워야 할 차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해(解)’, 즉, 올바른 이해입니다.
경전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실천 행이 뒤따라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실천 행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해’에 대해서는 소홀히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열심히 하는 사람도
경전을 읽고, 강의를 듣고, 불법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듯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부처님도, 2,500년 전 당시 제자들을 교화하고 전법 하실 때,
법을 설함으로써 가르침을 전달하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굳은 믿음을 가지고
불법을 배워 실천 수행을 하게 되었을 때‘[行]’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증(證)인 것입니다.
‘증’이란, 작은 의미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수행을 하였을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크고 작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불법을 생활화하는 가운데 환희심을 느끼고,
나름대로 ‘증’을 경험하게 되는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스스로의 작은 깨달음은
우리들에게 보다 굳은 신심(信)을 가져다줍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다시금 우리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신, 해, 행, 증 이후엔
또다시 신, 해, 행, 증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다 큰 의미에서의 ‘증’은,
당연히 부처님의 크나큰 반야지혜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생활수행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상 속에서의 작은 깨침, 깨침의 조각들이 모두 ‘증’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증’은 또다시 굳은 믿음(信)을 가져다주고,
다시금 신해행증 할 수 있는 수행력과 불퇴전의 가행정진을 불러옵니다.
이렇게 신해행증의 수행이 계속 되어질 때
결국 부처님께서 증득하셨던
밝은 깨침의 반야지혜를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해, 행, 증’의 단계가 바로
방편반야[解], 관조반야[行], 실상반야[證]와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반야’의 힘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 힘은 평등, 절대, 무념(無念), 무분별(無分別),
비움의 경지일 뿐 아니라,
반드시 상대의 차별 현상을 관조(觀照)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단순히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현명함이나
지식이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모습에 대한 ‘눈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깨달음의 문제에서부터,
지금, 이곳 우리의 사회에서 생겨나는 모든 문제 해결이
‘반야’ 속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살이의 자질구레한 문제에서부터,
인간 개개인적인 문제, 사회 문제, 환경 문제,
정치 문제, 경제 문제, 노사 문제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문제 등
그 어떤 문제라도
‘반야’의 지혜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반야의 지혜는 사회의 모든 현상을, 선입견, 편견, 고정된 관념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안목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반야’는 부처님이나
산 속에서 정진하는 스님들만이 얻을 수 있는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지혜가 아닙니다.
누구나 수행을 통해서 바로 지금 이 곳에서 ‘반야’의 지혜를
구체적으로 획득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반야’의 성취는 인생과 우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는 일이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행복을 성취하는 길이고,
사회의 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며,
해탈을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반야’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보살은 열반을 얻으며, 중생은 당면한 문제와,
나아가서는 삶과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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