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견(照見)이란 ‘비추어 본다’는 의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라고 하면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이나 어떤 상(相)을 짓지 않고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와 남을 둘로 나누고, 좋고 나쁜쪽으로 둘로 나누는 등의 둘로 셋으로 쪼개어 대상을 파악하는 분별심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로 바라보는 것이 조견입니다. 그렇기에 어느 한쪽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의 관찰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바로 이 현실의 조견, 즉 있는 그대로를 다만 있는 그대로 보셨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팔정도의 정견(正見)이기도 합니다.
요즘 위빠사나라는 수행법이 많이 실천되고 있는데요, 이 위빠사나라는 것 또한 있는 그대로를 왜곡이나 판단분별, 망상과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조견과 다르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 조견이야말로 불법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견이라는 중도적인 관찰, 분별없는 관찰을 별도의 수행법처럼 억지로 힘들여 갈고 닦아야 한다거나, 특정한 자세를 취하고, 특정한 고요한 곳을 찾아가 방석 위에 앉아 수행법을 실천하듯 닦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견은 하나의 유위적인 수행법이라기보다는 무위의 함이 없는 실천행입니다.
왜 그럴까요? 조견은 쉽게 말하면 ‘봄’입니다. ‘보는 것’입니다. 보되, 왜곡 없이, 분별없이, 판단이나 망상을 개입시키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은 전혀 힘이 들지 않습니다. 애써서 노력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존재의 상태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누워서 쉬고 있을 때라도 하늘로 새가 한 마리 지나가면 저절로 비추어 봅니다. 힘들여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있는 모든 이들이라면 그저 자연스럽게 보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조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거기에 생각을 개입시킵니다. 무슨 무슨 새 하고 이름을 짓거나, 크다거나 작다거나,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거나 까마귀가 울면 재수가 없다는 등의 분별을 시작합니다. 이것을 명상(名相)이라고 하는데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이름을 붙여서 보거나, 모양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인식된 대상은 이것과 저것을 분별해서 상을 짓고, 대상마다의 특정한 이름을 지어 인식함으로써 우리에게 대상이 분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상을 안다고 할 때는 이런 방식으로 대상을 분별해서 인식합니다. 그러면서 생각은 무한한 상상력으로 과거와 미래를 오고 가면서 끊임없이 생각과 분별망상을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더 이상 조견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양과 이름을 붙여서 인식하고, 분별해서 바라보고, 나에게 득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를 판단하는 등 무수한 생각과 분별망상을 대상에 덮씌워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나에게 도움 되는 대상은 좋다고 하면서 집착해서 더 가지려고 애쓰고, 도움이 안 된다 싶으면 싫다고 하면서 거부하려고 애쓰는 버거운 일들이 시작됩니다. 집착하는 것을 갖지 못하면 괴롭고, 싫은 것과 함께 해야 하면 그 또한 괴롭습니다.
이처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조견해서 바라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분별하고 이름 짓고, 상을 지으면서부터 대상은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문제로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면 언제나 힘이 듭니다. 좋은 대상은 집착해야 하니 힘들고, 싫은 대상은 밀쳐내야 하니 괴롭습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머리로 굴려서 생각해내야 하니까 더욱 괴로워집니다. 사실은 그것이 진정 도움이 될지 안 될지를 전혀 알 수 없음에도 우리 머리와 생각은 어떻게든 도움 될지 안 될지를 비좁은 자기의 생각 한계 내에서만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각대로 되면 즐겁고, 그 생각대로 안 되면 괴롭다고 여깁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과 분별심은 끊임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대상으로 끊임없이 숱한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중생인 이유입니다.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지금까지 벌여왔던 이 모든 과정을 그저 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끊임없이 둘로 나누어 놓고 분별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던 머리를 그저 쉬고,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됩니다. 조견하면 되는 것이지요.
글쓴이:법상
조견(照見)이란 ‘비추어 본다’는 의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라고 하면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이나 어떤 상(相)을 짓지 않고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와 남을 둘로 나누고, 좋고 나쁜쪽으로 둘로 나누는 등의 둘로 셋으로 쪼개어 대상을 파악하는 분별심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로 바라보는 것이 조견입니다. 그렇기에 어느 한쪽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의 관찰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바로 이 현실의 조견, 즉 있는 그대로를 다만 있는 그대로 보셨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팔정도의 정견(正見)이기도 합니다.
요즘 위빠사나라는 수행법이 많이 실천되고 있는데요, 이 위빠사나라는 것 또한 있는 그대로를 왜곡이나 판단분별, 망상과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조견과 다르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 조견이야말로 불법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견이라는 중도적인 관찰, 분별없는 관찰을 별도의 수행법처럼 억지로 힘들여 갈고 닦아야 한다거나, 특정한 자세를 취하고, 특정한 고요한 곳을 찾아가 방석 위에 앉아 수행법을 실천하듯 닦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견은 하나의 유위적인 수행법이라기보다는 무위의 함이 없는 실천행입니다.
왜 그럴까요? 조견은 쉽게 말하면 ‘봄’입니다. ‘보는 것’입니다. 보되, 왜곡 없이, 분별없이, 판단이나 망상을 개입시키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은 전혀 힘이 들지 않습니다. 애써서 노력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존재의 상태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누워서 쉬고 있을 때라도 하늘로 새가 한 마리 지나가면 저절로 비추어 봅니다. 힘들여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있는 모든 이들이라면 그저 자연스럽게 보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조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거기에 생각을 개입시킵니다. 무슨 무슨 새 하고 이름을 짓거나, 크다거나 작다거나,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거나 까마귀가 울면 재수가 없다는 등의 분별을 시작합니다. 이것을 명상(名相)이라고 하는데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이름을 붙여서 보거나, 모양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인식된 대상은 이것과 저것을 분별해서 상을 짓고, 대상마다의 특정한 이름을 지어 인식함으로써 우리에게 대상이 분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상을 안다고 할 때는 이런 방식으로 대상을 분별해서 인식합니다. 그러면서 생각은 무한한 상상력으로 과거와 미래를 오고 가면서 끊임없이 생각과 분별망상을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더 이상 조견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양과 이름을 붙여서 인식하고, 분별해서 바라보고, 나에게 득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를 판단하는 등 무수한 생각과 분별망상을 대상에 덮씌워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나에게 도움 되는 대상은 좋다고 하면서 집착해서 더 가지려고 애쓰고, 도움이 안 된다 싶으면 싫다고 하면서 거부하려고 애쓰는 버거운 일들이 시작됩니다. 집착하는 것을 갖지 못하면 괴롭고, 싫은 것과 함께 해야 하면 그 또한 괴롭습니다.
이처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조견해서 바라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분별하고 이름 짓고, 상을 지으면서부터 대상은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문제로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면 언제나 힘이 듭니다. 좋은 대상은 집착해야 하니 힘들고, 싫은 대상은 밀쳐내야 하니 괴롭습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머리로 굴려서 생각해내야 하니까 더욱 괴로워집니다. 사실은 그것이 진정 도움이 될지 안 될지를 전혀 알 수 없음에도 우리 머리와 생각은 어떻게든 도움 될지 안 될지를 비좁은 자기의 생각 한계 내에서만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각대로 되면 즐겁고, 그 생각대로 안 되면 괴롭다고 여깁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과 분별심은 끊임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대상으로 끊임없이 숱한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중생인 이유입니다.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지금까지 벌여왔던 이 모든 과정을 그저 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끊임없이 둘로 나누어 놓고 분별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던 머리를 그저 쉬고,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됩니다. 조견하면 되는 것이지요.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