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9)

202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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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한다. 깨달은 자가 법을 설할 때, 깨달은 이의 마음이 법문을 듣는 이의 마음에 곧바로 전해져 곧바로 같은 것을 확인함으로써 깨닫는 것이다. 법문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법문하는 이의 마음과 공명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이심전심이다. 이 공부는 깨달은 자와 공명하는 공부다. 그래서 선의 초기에 깨닫는 방법은 한결같이 언하대오(言下大悟), 언하변오(言下便悟)였다. 즉 법문을 듣고 깨닫는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아함경』이나 『니까야』를 보더라도 제자들은 항상 부처님 법문을 듣고 법문 끝에 깨달았다. 선어록에 나와 있는 무수히 많은 깨달음의 기연(機緣)을 검토해 봐도 좌선하다가 깨닫거나, 수행하다가 깨달았다는 대목은 찾아볼 수 없다. 법문을 듣다가 깨닫고, 법문을 듣고 진리를 확인하겠다는 발심을 안고 살아가다가 문득 대상을 보다가 깨닫고, 소리를 듣다가 깨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법문을 듣다가 깨닫거나, 법문을 들은 사람이 법문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다가 일상생활 속에서 문득 깨닫는 것이다.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스님은 “상근기 중생이라면 문득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서 말을 듣고 바로 깨달아서,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 즉시 자기 본성을 깨닫는다”라고 했다. 법문을 듣다 보면, 깨달은 스승은 한결같이 자신이 확인한 깨달음을 가리켜 보인다. 이것이 선의 본령인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다. 그러나 스승이 아무리 가리켜 보여도 중생은 늘 해오던 분별과 업식(業識)의 습관 때문에 자신의 본래면목을 보지 못한다.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하고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렇게 모를 뿐이며, 의식이 꼼짝 못 하고, 생각으로 알 수 없고, 답 없는 물음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져 의문이 꽉 차게 된다. 그러다 한순간 스승의 가르침 끝에 몰록 깨닫게 되는 때가 온다. 문득 스승의 법문을 통해 스승이 가리켜 보이는 스승의 본래면목, 나 자신의 본래면목이 확인되는 때가 오는 것이다. 깨달음은 이렇게 온다. 너무 단순하지 않은가?

수행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스승의 법문을 듣고 스승의 가르침의 파동과 공명하다 보면, 어느 순간 둘 사이의 파동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스승의 법문을 듣지만 무엇을 가리켜 보이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답답한 시간을 보내다가, 저절로 의식과 분별이 멈추어 궁금함만 남게 된다. 인간 존재는 스스로 문제를 던지고 그 문제를 풀고자 하는 내적인 동력이 강해지면, 스스로 그 답을 낼 수밖에 없는 존재다. 답은 언제나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곧 부처요 신이며, 진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스승은 언제나 제자를 이렇게 이끈다. 스승은 법문을 통해 제자의 오랜 습관인 생각, 분별, 의식, 망상하는 버릇을 저절로 꽉 막히게 이끈다. 생각으로는 가 닿을 수 없음을 깨닫고 의식이 절망하게 만든다. 생각, 분별, 망상, 의식을 모조리 빼앗아 버린다. 생각으로는 답을 낼 수 없도록 이끈 뒤, 스승이 자명하게 확인하고 있는 ‘법의 자리’를 직지인심해서 매 순간 법문을 통해 가리켜 보인다. 제자는 스승이 무엇을 가리켜 보이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모를 뿐’이라는 의식의 감옥에 갇혀 버린다. 이것이 간화선에서 말하는 ‘화두(話頭)’요, 화두가 의단독로(疑團獨露)된 상태다.

그러나 일반인으로서는 스승에게 ‘뜰 앞의 잣나무’니, ‘마삼근’이니 하는 화두를 받는다고 해서 없던 화두가 생겨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초기 조사선에서는 스승이 법문을 통해 제자에게 저절로 화두가 돈발하도록, 화두가 저절로 들리도록 이끌어 주었다. 물론 초기 조사선에는 ‘화두’라는 단어조차 없지만 말이다.

이 점이 바로 초기 조사선의 놀라운 점이다. 초기 조사선이라고 불리는 이 진짜 선에서는 따로 정해진 수행법이 없다. 말 그대로 길 없는 길이며, 유위조작의 수행이 아닌 진짜 중도이고, 반야바라밀이다. 이것이 바로 초기선의 방법 아닌 방법이 우리를 깨어남으로 이끄는 비밀이다.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너무도 쉽다. 말하자면 스승이 알아서 다 해주는 것이다. 음식으로 따지면 스승이 식재료를 찾아 요리도 다 하고 심지어 다 씹어서 입에 넣어 주는 것이다. 제자는 그저 꿀꺽 삼키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아난존자가 ‘바른 스승과 도반을 만나는 것은 깨달음의 반을 이루는 것처럼 중요한 것 같습니다.’라고 했을 때, ‘아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는 것은 깨달음의 반이 아닌 전부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조사선이라고 일컬어지는 초기 선불교의 수행은 스승에게 의지해 법문을 듣기만 하면 저절로 발심과 신심, 화두 돈발과 분별심의 조복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오도(悟道)시스템이었다. 즉, 스승의 법문 속에 이 모든 과정이 저절로 녹아들어 있기에, 제자는 오로지 주어진 삶의 역할, 일과를 하며 그저 법문을 듣기만 하면 되었다.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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