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듣는다는 것은 어떻게 듣는가? 귀(耳根)로 듣는가? 귀의 의식(耳識)으로 듣는가? 뜻의 의식(意識)으로 듣는가?...
귀로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요, 귀의 의식이나 뜻의 의식으로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함으로써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지, 어떤 한 법이 소리를 듣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귀는 감각이 없기 때문에 소리를 듣지 못하고, 식은 색깔도 없고, 상대도 없고, 처소(處所)도 없는 까닭에 역시 소리를 듣지 못하고, 소리 자체도 감각이나 감관이 없기 때문에 소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귀가 망가지지 않았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에 이르렀으며, 뜻으로 듣고자 한다면 육근(六根)과 육경(六境)과 육식(六識)이 화합하였기 때문에 이식(耳識)이 생기며, 이식이 생기면 의식이 갖가지 인연을 분별하여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소리를 듣는가?’하고 힐난할 것은 아니다.
불법에는 어느 한 법이 짓거나 보거나 아는 일은 없나니, 다음의 게송을 보라.
업(業)도 있고 과(果)도 있지만
업과 과를 짓는 자(作者)는 없다.
이는 가장 높고 심히 깊은 법이니
오직 부처님만이 밝게 아신다.
공하지만 단멸(斷)하는 것은 아니요,
상속하지만 항상(常)하는 것도 아니다.
죄와 복 또한 이와 같으니
이런 법을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 이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법이다. 귀가 제 혼자서 듣는 것도 아니고, 소리가 제 혼자서 듣는 것도 아니며, 귀의 의식이 듣는 것도 아니고, 뜻의 의식이 듣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인연 따라 화합할 때만 비로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경식(根境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이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화합하여 접촉할 때 의식이 생겨나고 그 의식에서 느낌과 애욕과 집착 등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십팔계(十八界)요 십이연기다.
육근 혼자서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는 것도 아니고, 육경 혼자서도 아니며, 육식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잘 모였을 때만 비로소 소리도, 빛깔도, 냄새도, 감촉도 느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어느 한 법만이 저 홀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다. 인연법에는 저 홀로 하는 것이 없다. 인과 연이 서로를 받쳐 주고 도와주고 맺어주어야지만 과보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원인도 있고 조건도 있고, 결과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생멸법일 뿐이지 실체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다. 실체가 없는 것들이 수많은 조건과 인연화합으로 모이면 잠시 꿈과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낼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인도 있고 연도 있고 조건도 있고 결과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의 주관자는 없다. 업을 짓기도 하고 받기도 하지만 업을 짓거나 받는 ‘자’는 없다. 초기경전에서 ‘업보(業報)는 있되 작자(作者)는 없다’는 것이 이를 말한 것이다. 업도 있고 과보도 있지만 그 업을 짓고 받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아이고 공이다. 실체가 없음에도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이렇듯 공하지만 단멸하는 것이 아니고 상속하지만 그렇다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텅 빈 가운데 있지만, 있는 가운데 없다. 마치 촛불과 같이 처음 탈 때의 불꽃과 나중의 불꽃이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것과 같다.
죄와 복도 그와 같다. 죄도 있고 죄의 과보도 있고, 복도 있고 복의 결과도 있지만 죄를 ‘짓는 자’나, 복을 ‘받는 자’는 없다. 죄나 복도 중도(中道)이기에,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단멸하는 것도 아니니, 한 번 죄를 지으면 절대적인 죄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죄가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 가능성인 것이다.
죄를 지었더라도 죄라는 것이 상주하는 것은 아니니 절대적인 ‘죄인’으로 낙인찍힐 것도 없고, 죄의식에 시달릴 것도 없다. 그렇다고 단멸하는 것은 아니니 참회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며, 복도 지어야 한다. 상주나 단멸이 아니라,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니 마음으로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복을 받을지, 죄의 업보를 받을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죄를 지었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인연을 짓느냐에 따라 죄업을 비껴갈 수도 있고, 복을 지었더라도 그 이후에 다시 나쁜 마음으로 산다면 복의 결과를 못 받게 될 수도 있다.
언제나 연기법과 중도의 가르침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내 마음이 주인이 되어 어떤 결과를 맺을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존재, ‘짓는 자’가 없으니, 스스로를 죄인으로 낙인찍을 것도 없고, 죄의식에 시달릴 것도 없고, 복 짓는 사람이라고 자랑할 것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고, 우리는 다만 그 모든 것을 그저 지켜볼 뿐이다.
글쓴이:법상
듣는다는 것은 어떻게 듣는가? 귀(耳根)로 듣는가? 귀의 의식(耳識)으로 듣는가? 뜻의 의식(意識)으로 듣는가?...
귀로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요, 귀의 의식이나 뜻의 의식으로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함으로써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지, 어떤 한 법이 소리를 듣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귀는 감각이 없기 때문에 소리를 듣지 못하고, 식은 색깔도 없고, 상대도 없고, 처소(處所)도 없는 까닭에 역시 소리를 듣지 못하고, 소리 자체도 감각이나 감관이 없기 때문에 소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귀가 망가지지 않았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에 이르렀으며, 뜻으로 듣고자 한다면 육근(六根)과 육경(六境)과 육식(六識)이 화합하였기 때문에 이식(耳識)이 생기며, 이식이 생기면 의식이 갖가지 인연을 분별하여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소리를 듣는가?’하고 힐난할 것은 아니다.
불법에는 어느 한 법이 짓거나 보거나 아는 일은 없나니, 다음의 게송을 보라.
업(業)도 있고 과(果)도 있지만
업과 과를 짓는 자(作者)는 없다.
이는 가장 높고 심히 깊은 법이니
오직 부처님만이 밝게 아신다.
공하지만 단멸(斷)하는 것은 아니요,
상속하지만 항상(常)하는 것도 아니다.
죄와 복 또한 이와 같으니
이런 법을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 이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법이다. 귀가 제 혼자서 듣는 것도 아니고, 소리가 제 혼자서 듣는 것도 아니며, 귀의 의식이 듣는 것도 아니고, 뜻의 의식이 듣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인연 따라 화합할 때만 비로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경식(根境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이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화합하여 접촉할 때 의식이 생겨나고 그 의식에서 느낌과 애욕과 집착 등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십팔계(十八界)요 십이연기다.
육근 혼자서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는 것도 아니고, 육경 혼자서도 아니며, 육식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잘 모였을 때만 비로소 소리도, 빛깔도, 냄새도, 감촉도 느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어느 한 법만이 저 홀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다. 인연법에는 저 홀로 하는 것이 없다. 인과 연이 서로를 받쳐 주고 도와주고 맺어주어야지만 과보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원인도 있고 조건도 있고, 결과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생멸법일 뿐이지 실체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다. 실체가 없는 것들이 수많은 조건과 인연화합으로 모이면 잠시 꿈과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낼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인도 있고 연도 있고 조건도 있고 결과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의 주관자는 없다. 업을 짓기도 하고 받기도 하지만 업을 짓거나 받는 ‘자’는 없다. 초기경전에서 ‘업보(業報)는 있되 작자(作者)는 없다’는 것이 이를 말한 것이다. 업도 있고 과보도 있지만 그 업을 짓고 받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아이고 공이다. 실체가 없음에도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이렇듯 공하지만 단멸하는 것이 아니고 상속하지만 그렇다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텅 빈 가운데 있지만, 있는 가운데 없다. 마치 촛불과 같이 처음 탈 때의 불꽃과 나중의 불꽃이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것과 같다.
죄와 복도 그와 같다. 죄도 있고 죄의 과보도 있고, 복도 있고 복의 결과도 있지만 죄를 ‘짓는 자’나, 복을 ‘받는 자’는 없다. 죄나 복도 중도(中道)이기에,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단멸하는 것도 아니니, 한 번 죄를 지으면 절대적인 죄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죄가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 가능성인 것이다.
죄를 지었더라도 죄라는 것이 상주하는 것은 아니니 절대적인 ‘죄인’으로 낙인찍힐 것도 없고, 죄의식에 시달릴 것도 없다. 그렇다고 단멸하는 것은 아니니 참회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며, 복도 지어야 한다. 상주나 단멸이 아니라,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니 마음으로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복을 받을지, 죄의 업보를 받을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죄를 지었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인연을 짓느냐에 따라 죄업을 비껴갈 수도 있고, 복을 지었더라도 그 이후에 다시 나쁜 마음으로 산다면 복의 결과를 못 받게 될 수도 있다.
언제나 연기법과 중도의 가르침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내 마음이 주인이 되어 어떤 결과를 맺을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존재, ‘짓는 자’가 없으니, 스스로를 죄인으로 낙인찍을 것도 없고, 죄의식에 시달릴 것도 없고, 복 짓는 사람이라고 자랑할 것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고, 우리는 다만 그 모든 것을 그저 지켜볼 뿐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