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개공(皆空) - 오온개공의 실천

202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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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오온이 모두 공하다면 우리는 어떤 실천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지금까지 오온이 나인 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몸이 나인 줄 알고 몸에 집착해 왔고,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이 나인 줄 알고 그런 것들을 중요시 여기며 따라다니고 살았습니다.

오온이 공한 줄 알았다면, 이제부터는 오온을 따라다니는 삶, 오온에 종속되고 속박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온이 바로 나라는 생각은 헛된 망상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색온(色蘊)을 먼저 살펴보지요. 먼저 이 몸이 ‘나’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이 몸 하나에 얼마나 많이 종속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몸을 쓰며 한 생을 살아야 하다보니 적절하게 잘 관리는 해야 하겠지만, 과도하게 육체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더욱이 이 몸을 ‘나’라고 규정할 것은 없습니다. 사실 이 몸이 ‘나’라고 여기는 것도 하나의 관념에 불과할 뿐입니다.

외모에 집착해 과도한 성형수술을 하거나, 심하게 다이어트를 하거나,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나는 못생겼다’거나, ‘나는 뚱뚱하다’고 자신을 규정합니다. 그러나 그 외모나 몸매는 내가 아닙니다. 색온개공입니다. 그것은 진짜 나가 아닙니다. 잠시 이 생에 필요에 의해 쓰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 몸을 나라고 여겨 동일시하게 되면, 몸이 뚱뚱하거나 외모에 자신이 없는 것을 가지고 ‘나’라는 존재까지 자존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몸이 뚱뚱하거나 외모가 못난 사람일지라도 자존감을 가지고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만약 뚱뚱한 몸이나 못생긴 외모가 절대적으로 괴로운 것이고, 그것이 곧 나라면 그런 몸과 외모를 가진 사람은 모두 다 괴로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지요. 사실 뚱뚱하다거나 못생겼다는 것은 실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허망한 관념에 불과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일 뿐, 그것 자체에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이 몸이 곧 나다’라는 생각에 빠져 있으면 우리는 몸에 종속되고 구속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몸이 나’라는 생각에서 놓여나면 그런 허망한 관념에 휘둘리며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수온(受蘊)입니다. 느낌이 일어나면 그동안은 그 느낌을 따라가기 바빴습니다. 좋은 느낌이 일어나면 그 좋은 느낌을 더 느껴보려고, 계속해서 느끼려고 집착하고 붙잡으려 쫒아 다녔습니다. 나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대상이나 소유물들을 더 많이 소유하려고 애써왔습니다. 이런 것을 느낌을 따라다닌다고 표현합니다.

이제부터는 오온이 공하고, 느낌이 공함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느낌을 따라다니지 않을 수 있겠지요. 느낌이나 감정에 사로잡혀 마음 상해 할 필요도 없고, 누가 나를 욕한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상처를 받을 것도 없습니다. 좋은 느낌을 따라 갈 필요도 없고, 싫은 느낌으로 인해 상처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느낌은 인연 따라 잠시 왔다가 가는 허망한 것일 뿐, 그것이 실체가 아니며, 더욱이 ‘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싫은 느낌, 찜찜한 느낌, 소외된 느낌, 혼자이고 외로운 느낌이 들 때 우리는 곧바로 ‘나는 외롭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소외되었다’라고 여기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외로운 것이 아니라, 다만 외롭다는 느낌이 인연 따라 잠깐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을 나와 동일시하면 내가 괴롭게 되지만, 흘러가는 구름 같은 것으로 여겨 그저 무심히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느낌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상온(想蘊), 즉 생각을 따라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에 5만 가지 이상의 생각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그 무수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 생각을 따라다니기 바쁩니다. 가만히 앉아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다가도 문득 어떤 생각을 하나 떠올리고는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없이 많은 생각을 만들어내 나를 사로잡아 버립니다. 그 수많은 생각의 홍수라는 늪에 빠져 하루 종일 헤어 나오지 못하니 얼마나 힘들고 번잡한 삶을 사는 것입니까.

또한 우리는 그렇게 일어난 수없이 많은 생각을 나와 동일시합니다. 나쁜 생각을 일으키고는 깜짝 놀라서 자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여기 어딘가에서 어떤 생각이 하나 올라왔을 뿐이지, 내가 나쁜 생각을 하는 자인 것도 아니고 내가 나쁜 놈인 것도 아닙니다.

 

행온(行蘊)도 그렇습니다. 한 가지 의도를 일으키고는 그렇게 일으킨 의도가 바로 ‘나의 견해’라고 여깁니다. ‘내 의지’라고 여기지요. 자신이 일으킨 바람, 욕구, 의도, 의지를 따라가면서 그 의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자신을 채찍질합니다. 그 의도대로 살지 않으면 자기답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자신은 자신이 규정지은 특정한 의도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틀에 가두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래놓고 그 틀대로, 그 의도대로 살지 않으면 못 사는 사람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어떤 의도도 실체적인 것은 없고, 그 의도를 일으켰다고 그것이 ‘나의 의도’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지를 가진 사람이 나인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식온(識蘊) 즉 분별심을 따라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곧 분별의 삶입니다. 내가 잘 사는지 못 사는지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분별한 것일 뿐입니다. 내가 잘났는지 못났는지도 다만 내가 그렇게 분별한 것일 뿐이고, 내가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도 다만 내가 그렇게 분별했을 뿐입니다. 분별이란 둘로 나누어 놓고 남들과 비교 판단 결과로 만들어지는 허망한 의식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내가 분별한 모든 것은 실체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분별해서 의식한 것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얼마나 의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까. ‘나’에 대한 모든 관념들, 모든 분별들이 전부 다 진짜 ‘나’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허망하고 삿된 분별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줄 안다면 분별에 휘둘려 괴로워할 필요가 없겠지요.

내가 능력이 있다고 분별해 우쭐 할 것도 없고, 내가 능력이 없다고 분별심을 내어 좌절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분별심이라는 식온을 따라다니는 종속적인 삶일 뿐입니다.

분별하는 것은 전혀 ‘나’가 아닙니다. 다만 허망하게 분별된 것일 뿐입니다. 내가 부자인지 아닌지, 내가 성격이 좋은지 나쁜지,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전혀 분별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지만, 다만 우리의 분별심이 그러한 여여(如如)한 삶에 시비를 걸고, 판단분별을 덮어씌우고 있었을 뿐입니다.

분별심만 따라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있는 그대로 여법해지고, 평화로워 질 것입니다.

이상에서처럼 오온이 개공이라는 사실에 눈뜨게 된다면, 그 오온을 ‘나’라고 여기면서 오온을 따라다닐 필요가 없게 됩니다. 오온의 하나 하나에 휘둘리고 종속되면서 일희일비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나라고 여기는 하나의 망상일 뿐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체적인 ‘나’가 없다면 괴로울 내가 어디에 붙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오온개공의 가르침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나다 하는 허망한 아상에 속지 않게 만들어주고, 한결같이 여여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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